집 / 조일희
양지바른 구릉이 시끌시끌하다. 이장하는 인부들이 평평한 곳을 찾아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는다. 세월에 풍화된 육신은 제자리로 돌아간 지 오래고, 회백색 시간이 담긴 뼛조각만 백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닥에 유골을 길게 늘여 놓으니 사뭇 사람의 형체처럼 보인다. 육탈한 모습 위로 생전의 아버지가 겹쳐 보여 일순 마음이 숙연해진다.
몇 해 전, 친정엄마 생신날이었다. 상을 물린 후 엄마는 "흩어져 있는 묘를 한곳에 모아놓고 죽어야 편히 죽을 수 있겠다"며 이장에 대해 넌지시 운을 뗐다. 밭 한 뙈기 없는 빈한한 집으로 시집왔으니 어디 제대로 된 선산이나 있었겠는가.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동으로 서로 제각각 모셨을 수밖에. 자식들은 유골을 화장해 가까운 납골당에 모시자고 입을 모았지만 엄마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마땅한 터를 찾으러 분주히 돌아다녔다. 고향 근처 자투리땅을 마련한 후에야 깊숙이 눌러놨던 당신의 진짜 속내를 꺼내놓았다. "나 죽으면 니 아버지 옆에 눕고 싶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비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부의 연을 붙잡고는 있었지만 두 분이 다정히 한집에 산 적이 없었기에 그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엄마 얼굴 위로 흑백 사진 한 장이 어룽거렸다. 형형한 눈빛을 한 젊은 아버지가 앞을 향해 서있고, 긴 면사포를 쓴 앳된 엄마가 퍽이나 낯설었다. 그랬다. 엄마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한 남자의 사랑으로 두 볼이 발그레해지고, 한 사람을 생각하며 가슴 설레는 날이 있었다. 하나 아버지의 부릅뜬 눈을 더는 볼 수 없듯 엄마의 꽃 시절도 흐릿한 사진 속에서만 잠깐 피었다 말라버렸다.
앞뒤가 잘린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옷을 입고 있다. 팔자걸음으로 문을 나서는 아버지를 보며 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것도 같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어린 나는 몰랐다. 그러나 그 무슨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엄마의 어두운 얼굴이 대신 말해주었다. 젊은 엄마는 손떠퀴가 사나운 아버지 대신 가장이라는 짐을 목덜미에 두르고 함박꽃 같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일찌감치 여자라는 장식을 벗고 어미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온 거다.
봄이 가고 또 봄이 와도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의 울타리에 갇혀 변변한 집 한 칸이 없었다. 엄마는 매나니로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이사 횟수가 더해지며 엄마의 아픔도 서러움도 한자씩 쌓여 갔으리라. 그래서일까. 엄마는 집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그러나 현실은 엄마의 바람과 반비례했다. 엄마의 희망은 점점 변두리로 밀려났다. 세를 얻어 기한이 끝나면 이전보다 더 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곁방살이 이십여 년 만에 엄마 소원대로 우리 집이 생겼다. 방 두 칸짜리 서민 아파트가 엄마의 오랜 꿈을 이루어주었다. 한숨과 눈물로 한장 한장 쌓아 올린 집에 아버지가 힘을 보탠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는 어렵사리 장만한 집에서도 오래 살지 못했다. 당신의 마음을 욱신거리게 하는 큰자식에게 집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길이 끊어짐과 이어짐의 연속이라면 집은 헤어짐과 만남의 연속 아닐까. 엄마는 다시 떠나야 했다.
엄마는 돌고 돌아 마침내 허름한 시골집에 붙박이로 살게 되었다. 엄마의 집은 소도蘇塗였다. 세상의 눈보라 속을 헤맬 때도, 사람들의 질시를 받을 때도 무람없이 찾아가 쉴 수 있는 곳, 그곳은 안식처이며 피난처였다. 이제 엄마도, 묵은 집도 툭 건드리면 풀썩 내려앉을 만큼 늙고 삭았다. 마지막 진액 한 방울까지 내어준 엄마는 당신의 남은 시간을 세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버지 옆에 눕고 싶다는 엄마 말은 불쑥 나온 말이 아니다. 천길만길 깊은 속내에서 오랫동안 곰삭아 나온 말이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가시 같은 아버지를 이제라도 끌어안고자 한 말이다. 조개의 상처가 영롱한 진주를 품듯 엄마는 평생 흘린 눈물을 모아 용서라는 보석을 만든 것이다.
뒤는 낮은 산이요 앞은 작은 개울이 흐르니 배산임수라는 말이 제법 어울리는 터다. 삭정이같이 마른 엄마가 오늘따라 기운이 넘친다. 아버지 유골을 만지는 인부들의 손길을 꼼꼼하게 참견하는 엄마 목소리가 한 옥타브나 높다. 네모나게 판 구덩이에 유골을 안장한 후 차례차례 흙을 뿌렸다. 제수를 앞에 두고 절을 올리는 자식들을 바라보던 엄마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아버지 묘소 옆에 입히지 않은 봉분이 하나 있다. 엄마의 가묘이다. 엄마가 영원히 살 집이다. 이승에서 한집에 살지 못한 회포를 저승에서나마 풀고 싶은 엄마의 염원이 담긴 집이다. 봉분 앞에 한참을 앉아있던 엄마가 흙을 털며 일어선다. 가슴에 뭉친 울결을 다 풀기라도 하듯 주름진 엄마 얼굴이 홀가분하다.
엄마의 영원한 안식처에 아카시아 향이 은은하게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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