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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옥당목 / 장규섭

에세이향기 2023. 4. 9. 07:01

 

옥당목 / 장규섭

신기한 일이다.  날마다 보는 이부자리인데도 옥당목 요 호청이 시선을 끈다. 보기에는 단조로운 흰빛이지만 약간 거칠듯 한 바탕이 석새삼베같이 성글게 보인다. 모양새와는 달리 가만히 어루만져보면 유난히 촉감이 부드럽다는 느낌이 와 닿는다. 깨끗이 꾸며놓은 요 호청이라 그런지 더욱 반지르르하고 여름 내내 비가와도 전혀 눅눅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 뿐이랴 우리의 체온에 맞게 온기를 조절해 주어 요즘 나오는 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오묘함마저 지니고 있는 듯하다. 씻을 때마다 꾸밈의 번거로움이 따르긴 해도 그것을 능히 에끼며 사용할 충분한 가치를 지녔기에 기꺼이 마다않고 옥당목을 꾸미는 감촉에 매료된다. 마치 편리한 생활을 거부하는 속성이라도 지닌듯 요즘 고급 천으로 미화된 침구류보다 옥당목 요 호청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세탁기에 넣어 씻고 삶은 다음 풀을 먹이는 일련의 과정들이 잠자는 옥당목의 숨결을 깨워 생기가 도는 신선한 촉감으로 살려내는 것이다. 촉촉할 때 길이를 정리하여 남편과 마주잡고 힘주어 당기다보면 늘어나고 틀어지는 부분도 정리된다. 정갈한 손길로 푸새질을 하고 밟거나 다듬이질하여 다시 말린 다음, 호청을 입힌다. 새하얀 요위에서 옥당목의 상쾌한 내음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마치 자연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미 10여 년 동안 애용해 온 것이지만 낡기는 커녕 꾸밀 때마다 신선하고 산뜻한 느낌이 피어난다. 다른 침구류에서 느끼지 못한 그 신선한 느낌이 살갗에 와 닿을 때 씨실 속에 징하게도 들락거리던 날실도 보풀보풀 되살아나 두런거린다. 긴 세월 곤궁했던 시절의 서러운 탄식을 자아내듯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옥당목의 고운 숨결이 내 살갗을 간질인다.
 10여 년 전, 아스라한 세월 구석진 밀실에서 은둔해 오던 어머님의 빛바랜 회억뭉치가 해묵은 냄새를 풍기며 조심스레 내 앞에 놓여졌다. 그 상자 속에는 당신이 손수 짜신 옥당목 두필이 빛바랜 창호지에 싸인 채 30여년이 넘도록 곱게 보관 되어 있었다. 맏아들의 혼숫감으로 쓰던 원시적 미덕은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을 터, 온갖 정성을 들인 보람도 없이 하마터면 무용지물이 될 뻔한 당신의 애물단지였다. 그 동안 잘 갈무리해 온 옥당목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시려는지 빛바랜 삼경을 펼쳐 보이셧다. 폭 한 자와 길이 마흔 자의 볼품없은(?)옥당목을 펴 보이시며 마치 함부로 할 수 없는 영혼이 깃든 물건인양 애절한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 세상에! 이건 옥당목이 아니에요?"
 
 "그래 맞다."
 
  두루마리의 가장자리에는 이미 세월의 누런 흔적이 켜켜이 말려 있었다. 마치 상인이 원단을 팔려고 권유하듯 내 마음을 끌어내려는 당신의 간곡한 손놀림으로 풀어지는 두루마리 속에는 도두보다 달리 놀랍도록 하얀 자태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토록 티끌하나 없이 깔끔하게 보관해 오신 걸까. 좀이라도 쳤다면 차라리 그 긴 세월이 얼만데 하며 당연시 할텐데 보관해 오신 손길이 무척 놀라웠다. 그 묵은해를 보내면서 조금도 변질이 없도록 보관해 오신 당신의 손길이 거룩하게 느껴졌다.
 "요즘같이 편한 세상에 누가 이렇게 일 많고 불편한 옥당목을 쓸까"
 체념하시는 듯 하면서도 애절한 호소력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당신의 부질없는 걱정이 내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뜻밖의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옛 장인의 물건처럼 종요롭게 여기는 며느리의 화답에 당신은 안도의 표정이 금세 화사한 낯빛으로 변해갔다.
 
 "그래 참 자알 됐다. 그렇잖아도 애비 혼숫감으로 짜 둔 것인데 잘 쓰도록 해라."
 
 평소 요 홑청을 갈았으면 하던 참에 가뭄의 단비처럼 내겐 정말 요긴한 물건이었다. 우선 한필을 가져와서 길이를 넉넉하게 잘라서 솔기를 잇고 푸서진 자리를 꺾어 박았다. 그런 다음 삶아 씻었더니 정말로 솜털처럼 깨끗해졌다. 주린 세월 속에서 보관해 온지 강산이 힘겹도록 세 번이나 바뀌고 사용한지도 어언 10여년이 넘은 옥당목이다. 풀을 먹여도 먹인 것 같지 않으면서 풍기는 신선한 느낌은 옥당목이 아니고서야 감히 어느 자연섬유가 흉내를 내겠는가? 요즘 잘 나온다는 면 100%의 고급 천도 이토록 신선한 느낌은 풍기질 않는다. 편리함과 화려한 문양만이 눈길을 끌뿐 체온에 닿는 느낌은 천연섬유인 옥당목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옥당목이란 씻은 다음 또 삶아야 하고 고운풀이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여러 번 주물러야 한다. 말리는 동안에도 손질을 해야만 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접어서 밟거나 다듬이질을 하고 활짝 펴서 다시 접어 다듬고 반복하며 손질하는 동안 당신의 가련했던 인고가 떠올랐다.
 어머님은 쓰라린 내 가슴을 누구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는 당신만의 아픔을 간직한 채 덤받이를 데리고 이 가문에 들어오셨다. 탐탁하지 않지만 굳이 마다할 험도 없기에 손이 귀한지라 할머님의 도타운 사랑이 배였다. 스스로 움츠려드는 자신을 위로해줄 어린 자식마저 홍역으로 잃어버린 쓰라린 가슴으로 주저로운 생활에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 오셨을까. 그 속에서도 당신은 구순한 노력으로 엉켜진 삶의 타래를 지혜롭게 잘 풀어 오셨다. 밤이 이슥하도록 무거운 누꺼풀을 끔뻑이며 갈퀴 같던 두 손은 쉴 새 없이 낳이 질을 하는 동안에도 시름겨운 노역에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 가난 속에 함몰된 삶을 일구느라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하고 애면글면 틈틈이 길쌈을 해야만 하는 고달픈 생활이란 그야말로 각고의 세월이었을 게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난의 시름은 가난에 대한 완충작용을 하는 동이로 바뀌고 시련을 감내하며 수많은 질곡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푸새 잘 후 투박해진 바탕에 입 안 가득 머금은 물을 산산이 부서지도록 왈칵 내뿜으며 쉬지 않고 내쳐 두들겨야 하는 다듬이 소리로 모은 한을 달래 온 것은 아닐까. 혹은 길쌈하는 베틀에서도 한번 두들겨도 될 바디를 두어 번 더 두들겨 북소리와 함께 허공 속으로 날려 보낸 것은 아니었는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어느새 당신의 내면에 잠재된 생채기는 일그러진 한스러움으로 유연하게 성숙해지고 인고의 노력 뒤엔 삶의 지혜도 오롯이 영글었을 것이다.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버린 당신의 애끓던 쓰라린 세월을 더듬어 보기엔 너무 역부족이지만 옥당목에 직조된 인고의 삶은 나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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