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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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난(蘭), 나다 / 서찬임

에세이향기 2023. 4. 9. 06:31

 말이 없는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지독한 인내다. 난초는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특히 난초는 더 그렇다. 누군가 난초는 게으른 사람이 키워도 될 만큼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솔깃하여 난초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난초는 말 없음 속에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시름시름 말라 갔다. 반항 같은 것이었다. 지극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처음엔 내 게으름에 화가 났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내 무신경이 나를 질책했다.  

 그 즈음이었다. 흙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삐죽이 내미는 것이 있었다. '꽃대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마터면 흙과 난을 신문지로 싸서 통째로 버릴 뻔 했다. 하찮은 식물이지만 자신이 버려진다는 것을 눈치 챘을까. 나는 내 마음에서 벗어난 것은 빨리 정리하는 편이다. 마치 게으름을 덮기라도 하듯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려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버린다. 중요한 서류를 버린 적도 여러 번이다. 산처럼 쌓인 분리수거장 앞에서 머리가 하얗게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아, 그런데 난초를 빨리 버리지 않았던 그 게으름이 참음으로 승화되어 난초의 새 생명을 보게 되었으니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난초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내 눈은 따뜻한 햇살처럼 난초를 내려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 난의 꽃눈을 위해 나는 아이를 가졌을 때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나 난과 대화를 나누었다. 난과 가까이 지낸 몇 날 동안 난의 질긴 생명력을 사랑하게 되었다. 난은 그랬다. 누군가의 보살핌에 목말라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지극한 사랑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지켜나가는 그 질기고도 질긴 신념을 나는 사랑한다. 어쩌면 뿌리째 뽑혀 던져질 뻔 한 한 아이의 생이 바로 저 난과 같으리. 그 신념이 아이의 삶을 지켜 나온 것임을 불혹의 마지막에 깨닫는다.

 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어머니가 댕강 잘라버렸다. 사내아이 같이 되어버렸다. 머리모양을 따라 아이는 장난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봄이면 개울에서 정신없이 노느라 다리에 거머리가 감기는 줄도 몰랐고, 여름이면 메뚜기를 잡아 등에 꿰어 줄줄이 사탕을 만들어 동네를 헤매던 악동이었다. 보자기를 쓰고 하늘을 난다며 흙더미위에 올라가 풀썩풀썩 뛰어 내릴 때가지도 아이는 쾌활하고 명랑했다. 아무리 흙에 뒹굴고 물에 첨벙거려도 맑은 얼굴은 감출수가 없었는지 사람들은 아이를 '난초 꽃대 같이 귀한 맏딸' 이라고 불렀다.

 겉모습은 반질반질한 화분 같은 아이의 집이었다. 한 두 차례 들리는 아이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울음소리, 간간이 가구 부서지는 소리만 없었더라면 굳이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한 달은 쉽게 흘러갔다. 봉급날이면 어김없이 평상에 앉아 불고기를 구워먹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진 자개장을 수리했고 현관문을 다시 달았다. 그리고 가정의 단란함을 과시라도 하듯이 영화 관람까지 하러 시내에 나가곤 했다. 그러나 아이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화분 속의 난이 조금씩 보이지 않게 말라 가듯이.

 부끄러움이 심해졌고 별것 아닌 일에도 죄책감을 느꼈고 모든 일이 고통으로 다가와 아이의 성격은 자꾸 안으로 안으로 잦아들었다. 누군가 이쁘다고 칭찬을 하면 괜히 눈물을 흘리고,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갔다. 동네사람들은 아이에게 '사춘기인가보다'로 단정을 지으면서도 수군거렸다.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의 삶에 투자해야할 시간도 모자라보였다. 아이를 바라봐주는 시간이나 손을 잡아주는 시간은 가뭄에 단비 맞듯 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땅 속으로 꺼져가고 있었다. 절제되지 못한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는 남자에 대한 상이 흐려졌다. 아이의 눈에 모든 남자는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무관심한 세상이 모두 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아이는 어둡고 탁한 자리에 내몰린 난초처럼 조금씩 스스로 몸에 물기를 빼고 말라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경멸했다. 이웃의 시선이 점점 따갑게 느껴져 갈수록 모래 속에 뾰족한 유리조각 같은 자존심이 아이를 찔러댔다. 모진 아픔을 참아내는 어머니를 보면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 한 방울의 수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간간히 죽음이라는 말을 잘근잘근 씹기까지 했다.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난과도 같았다.

 죽음은 존재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번개처럼 다가온다. 아이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고 아이의 눈에 슬픔이 가득 고였다. 늘 아프다고 누워 있는 어머니 곁에 먼지투성이 살림살이도 함께 드러누워 있었다. 어머니도 말라갔고 반찬도 말라비틀어졌고 아이의 마음도 썩어 들어갔다. 갈수록 심해지는 어머니의 병은 병명도 없고 고쳐지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의 방탕함은 아이를 수치스럽게 했다. 무관심과 무정 때문에 아이는 우주 속 하나의 먼지만큼 외로워 보였다. 아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아이는 내면의 쓰라림으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따.

 살아서 숨 쉬는 난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아이 아버지의 빳빳한 화투장속 난만이 살아 움직였다. 아이 아버지는 화투로 세상을 다 풀어내듯 밤새 화투장 속의 난을 패대기쳤고 날이 밝으면 집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난들을 패대기쳤다. 다 큰 아이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를 보호하기위한 바람막이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의 아버지는 어느 날 소리없이 사라졌다. 배신과 허무감으로 아이는 세상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겉모습의 난은 죽어 있었다.

 세상은 지옥이었다. 화려해야만 할 젊은 시절이 부담스러웠다. 아이의 첫발은 그랬다. 만만치 않은 돈벌이는 고통이었다. 학업은 이미 인생 이정표에서 탈락하여 빨간 가위표로 남게 되었다. 여름날 손님들에게 구워주었던 뜨거운 불판 위의 삼겹살 같은 삶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위해 살아야 했던 힘겨운 나날이었다. 말라 죽어가던 난초의 꽃대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한 아픔이 이토록 크단 말인가. 남의 식당 골방에서 쪽잠을 자던 아이는 툭하면 악몽에 시달렸고 식은땀을 흘렸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루에도 수없이 되뇌었지만 근질거리며 올라오는 꽃대를 누를 수는 없었다.

 죽음과도 같은 삶에 봄이 왔다. 어렵게 직장을 잡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놓지 않고 지켜온 직장도 쉽지만은 않았다. 상처투성이었다. 어느 누구의 격려나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시작한 사회생활을 지금까지 참아 냈던 아이가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이제는 '아픔'이라는 말보다 '행복'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살게 되었다. 버려진 듯 버려지지 않은 아이 삶의 '참음' 그것이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무관심 속에서도 죽지 않고 꽃대를 보여준 난蘭, 바로 나였다. 아버지의 그 혹독한 무관심과 무정이 오늘의내 꽃대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그때,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아이를 벗어나 어른이 되어, 난을 보니 이제야 그것이 보인다. 난을 보며 대견해 하고 있는 이 마음이 내 아버지의 마음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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