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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쌈 / 김종희

에세이향기 2023. 4. 9. 07:18

쌈 / 김종희

 어쩌다 가는 뷔페식당은 참으로 거북한 곳이다.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모양도 그렇지만 더 먹으려고 다시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이 편치가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녀적에는 양식당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마치 뜻 모를 팝송 한두 개쯤 따라 부르는 것처럼.

 세월 따라 식성도 바뀌고 습관도 바뀌었다. 이제는 온돌방에 눌러앉아 질펀하게 먹는 맛이 더 좋다.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아가며 먹는 맛이 더 좋다. 이것저것 섞으면 비빔밥이요, 요것저것을 얹어 먹으면 쌈밤이니 한 가지를 주문하고서도 덤으로 두 가지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음식이다. 주문을 받는 사람 앞에서 수프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나,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선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더 좋다.

 그 뿐이 아니다. 칼로 썰어 포크로 먹어야 하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그럴 때면 십자군이 자꾸만 떠오른다. 마치 내가 영토를 찾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진군하는 십자군이 된 듯하다. 서양의 포크나 나이프는 자르고 찍어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결국 상처를 내고야 만다. 그러나 우리의 젓가락 숟가락은 찌르지 않고도 먹을 수 있으니 상처가 나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우리는 유달리 쌈을 즐겨 먹는다. 바닷가 마을은 바다를 싸서 먹고 산골은 산을 싸서 먹고 농촌에서는 밭이나 들을 싸서 먹는다. 나도 쌈을 즐겨 먹는다. 어려서는 부뚜막에 선 채로 식은 된장과 식은 밥으로 시장기를 면하기도 했고 좀 더 자라서는 논두렁에 둘어앉아 쌈을 싸먹기도 했다.

 쌈은 먹는 맛보다 싸는 맛이 좋다. 손바닥에다 호박잎이나 콩잎을 펴고 밥을 담은 다음 그 위에 얹는 된장이며 새우젓 국물이 손을 타고 흐르면 그것을 여미기 위해 애쓰던 몸짓들, 한손에는 어정쩡하게 숟가락을 쥐고 볼이 미어터지도록 밀어 넣는 맛도 잊을 수 없다. 시어른 앞에서 맘껏 입을 벌릴 수 있는 것도 쌈을 먹을 때의 일이다. 호박잎에 얹어먹는 갈치찌개의 맛, 알싸한 고추가 씹히면 씹히는 대로 그 맛을 달리하는 것이 또한 쌈이 아닐까 싶다. 그 쌈의 바다에 바다가 오르기도 하고 들이 오르기도 하고 때로 이웃의 정이 오르기도 한다.

 쌈의 정신은 전래동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서양 구분없이 동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권선징악이다. 그러나 권선은 같을지 모르나 징악의 면은 분명히 차이가 난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서양의 징악은 죽음이다. 화형을 시키거나 또 다른 극단적이 처벌로 그들은 악을 벌한다. 이에 비해 우리식의 징악은 마음을 돌이켜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놀부나 뺑덕어미는 잘못된 마음을 뉘우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감으로서 막을 내린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아니 우리 음식 쌈에서 나온 정신이 아닐까 싶다.

 쌈을 싼다는 것은 더불어 산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쌈을 싸면서 우리는 일찍이 중용을 배우고 행하는지도 모른다. 쌈 속에 깃든 정신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태초에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단군의 건국정신이 들어있다. 만물의 중심을 사람으로 하는 인본주의, 손바닥에 놓고 세상을 싸서 먹는 것 또한 인간중심사상이 아닐까. 그러다 처용을 만난다. 아내를 탐하는 귀신을 나무라는 처용의 너그러움, 처용을 통해 나는 신라인의 중용을 배우기도 한다.

 그 뿐인가. 조선의 시조 속에 녹아든 넉넉함 속에서 나는 여유를 배우기도 한다. 부지런함을 제일로 여기던 농경사회 속에서 늦잠이란 게으름, 곧 업무태만이 아닌가. 동창이 밝았음에도 일어나지 않는 소 치는 아이에게 '사래 긴 밭은 언제 갈려하느냐'는 주인의 꾸짖음은 참으로 멋스럽다. 문을 화들짝 열고 이불을 당길 수도 있을 것이고, 마당에서 냅다 호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저 타이르고 만다. 동창이 밝았다고, 노고지리가 우짖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았냐고, 그 시조를 읽을 때마다 곰방대를 물고 살구나무 아래를 왔다갔다 하는 주인의 발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아니 소 치는 아이가 금방이라도 동창을 열 것만 같다.

 때론 수절하는 여인을 보쌈하여 가기도 했다. 어찌 보면 보쌈이라는 것은 수절여인의 절절한 고통을 들어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일부종사하는 윤리에 묶여 일생을 죽은 이의 위패를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어머니들, 측은하다 하여 어찌할 방도가 없던 시대, 그냥 두고 보자니 안쓰럽고 드러내자니 흉스럽고 그러다 보니 쌈을 싸듯 안아가는 보쌈, 어쩌면 보쌈이라는 것이 보고도 못 본척하라는 어른들의 으름장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조상들의 지혜란 참으로 기막힌 것이 아닌가.

 밀려드는 서구 문화에 편리함을 얻었지만 정작 우리는 그 편리함으로 인해 인정을 잊고 살아간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쌈 속에 들어있는 정신, 조상들의 중용과 멋을 배워야 할 때, 우리의 전통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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