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열애 중/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1. 22:47

열애 중/황진숙

 

엊저녁에는 새벽 3시까지 같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이불 속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그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필시 내일 다크서클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그의 앙탈이 늘었다. 당신 체면이 있지, 왜 이리 야단이냐고 짜증을 부려도 나밖에 없다며 속닥거린다. 한 옥타브 올려 다그쳐도 끔벅끔벅 앉아 있기만 하니 되레 미안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행복에 겨운 소리라고. 물론, 일 년에 한 번 은하수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우리는 행복일 수 있다.

번잡스러운 하루에 지쳤거나 관계가 주는 피로에 우울이 바닥을 치면 슬며시 그가 내 옆으로 온다. 모과 향기 그득한 식탁에 연그레이톤 벽지의 은은한 분위기가 밴 흔들의자에, 부산함이 떠도는 낮에 실루엣이 살아나는 새벽녘에도 불쑥 찾아온다. 바람 따라 흔들리듯 빗줄기가 꽃잎 두드리듯 가만히 어깨를 내어준다. 기대어 칭얼거리기도 하고 졸린 눈 문지르며 은근히 내 입술을 갖다 대기도 한다.

그에게선 풀냄새가 난다. 습하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은 숨결이 좋다. 그를 보고 있자면 명주바람을 타고 벙글거리는 초록물처럼 싱그러움이 가슴을 타고 오른다. 때로는 격정적인 열정으로 때로는 이마를 맞대는 순수함으로 감동을 준다. 씀바귀를 씹는 쓴맛이었다가 달래 같은 알싸한 맛으로 유채의 단맛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넘치는 생동감이 경이롭기만 하다.

마주 앉아 있으면 그는 내 안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나는 그의 본성을 찾기 위해 서로를 꿰뚫어 본다. 깊이 살아내지 못하고 넓게 마음 써 보지 못했으니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지혜를 갖춘 노련한 그에게 언제나 백전백패다. 얄팍한 속내로 그의 사유에 내 상념을 덧입혀 보기도 하지만 쭉정이처럼 가볍고 거스러미처럼 너덜거려 금방 들통이 난다. 존재의 심연에 닿지 못하는 깜냥이 여지없이 드러나곤 한다.

남모를 흠모로 시작된 사랑이었다. 속수무책의 끌림이었다. 우연히 눈이라도 맞았으면 좋았겠지만, 운명은 개척하기 나름이다. 분위기 있는 엽서에 시를 적고 아련한 심경을 편지지에 써 내려간다. 때가 되면 보여주리라. 노트에 가득히 그를 향한 그리움을 흘려놓는다.

‘벚꽃이 하르르 떨어지네요. 꽃잎 떨어진 자리에 여름이 오겠지요. 봄빛에 묶여버린 마음이야 놔주면 그만이지만 그대에게 눈멀고 귀먹은 이 맘은 어찌해야 할까요. 호젓한 산길의 고요 속에서 못물에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산 그림자 짙어지는 언덕에 서서 당신을 생각해요. 꿈결에라도 만나고 싶은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언제쯤 내 곁으로 올 건가요.’

시간이 흐를수록 외로움인지 기다림인지 모를 모호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삭막한 세상에서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허나 언젠가 만나리라는 운명을 예감한다. 몇십 번의 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가 내게 오기까지 반생이 걸렸으니 지독하다면 지독하다.

사랑은 환희와 고통의 면류관이라고 했던가. 그가 온 이후로 난 자유를 잃었다. 밥을 먹다가도 지인들과 수다를 떨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둥둥 떠다니곤 했다. ‘혼자’라는 말이 ‘같이’라는 기대를 동반한 말임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늘 혼자 걷던 산책로에 약속 없이 만나 같이 거닐던 가벼운 흥분, 팔짱 끼고 앉아 풀여치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동심. 가슴 속에 차오르는 그의 이미지를 놓치고 싶지 않아 수시로 긁적이고 밀려드는 감정들을 마음밭에 파종하느라 분주한 나날이었다.

그리 절절했건만, 그와 만날수록 다툼이 늘어만 간다. 보자마자 첫인사가 어둡다며 한 마디 한다. 분위기가 무겁고 딱딱하다며 놀리고 생뚱맞다며 골려댄다. 구렁이 담 넘듯이 부드러워야 한다며 꼬집는다. 미인은 잠꾸러기라지만 그리 잠을 많이 자서 날 어떻게 만날 수 있겠냐며 훈시를 한다. 다소곳한 이미지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매달리라 주문한다.

뿔다귀가 치솟은 나는 퍼부어댄다. 그러는 당신은 뭐 잘났냐. 묻는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기본, 잘난 척에 잔소리에. 불쑥 찾아와서 트집이나 잡고. 당신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호인이고 곁에 있는 내겐 왜 이리 까칠하냐. 괴팍한 성격으로 치자면 스크루지 영감 저리 가라고 할 정도다.

얼굴 보고 싶지 않다며 종내에는 이불 뒤집어쓰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런데도 표정 변화 없이 버티고 있는 당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하고 ‘탁’문을 닫는다.

안 될 일이었다. 애초에 잘못된 길이었을지 모른다. 거리낌 없이 들춰내는 그 앞에서 숙맥이 되어간다. 수렁에 빠진 기분이다. 늘 그를 생각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여음뿐이다. 절박한 나와 달리 아랑곳하지 않는 그를 보며 무너져 내린다.

멀어져간다. 하루 이틀···. 습관처럼 매일 만났기에 곳곳이 그의 흔적이다. 귀퉁이가 살짝 접힌 시집에서, 절전모드 중인 컴퓨터에서, 구석으로 밀어 넣은 문학행사 팜플렛에서 남겨진 그의 체취를 느낀다. 그의 잠재된 사유를 더듬고 싶어 성을 쌓아 놓은 책들에서 부유하는 먼지가 내 발목을 간질인다.

뒤돌아서기엔 너무 와 버린 걸까. 어둠 속에 들어앉은 듯 캄캄하다. 한뎃바람을 쐰 듯 차가워진다. 그의 독선에 질려버린 내 머리는 경고등을 보내고 있는데 보고파 시린 가슴이 그를 향해 달려간다. 남아 있는 원망도 화도 어딘지 모를 곳으로 마구잡이로 쓸려간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연리지처럼 동박새여야만 하는 동백꽃처럼 어느새 우리의 영혼은 하나였던 것이다. 그의 사랑이 시각으로 이루어지는 문자일지라도 내 사랑이 온몸으로 쓰는 몸짓의 언어이더라도 이미 우리는 한몸이었다.

‘별가루 흩어지는 밤을 지새우며 어스레한 새벽빛을 보며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는 거죠. 속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풀어지고 허물어져서 환희에 찬 감동을 맞아야겠죠. 당신은 내게서 나는 당신에게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그를 따를 수만 있다면 숙맥이어도 좋고 헛똑똑이가 되어도 좋으리. 지독한 내 사랑에 모든 걸 걸으리라. 영원한 나의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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