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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숯/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1. 22:39

숯/황진숙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도 없다. 타는 듯 붉은 낙엽의 열정도 없다. 꽃숭어리의 향기로움은 더더욱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묵직함이 있다. 운명을 절감한 생생함이 있다. 온 세상을 품은 담대함이다.

질박한 옹기 수반 위에 우뚝 서 있는 숯. 그의 자태는 현란한 언어보다 내재돼 있는 언어의 표현으로 완성된다.

제 살이 잘려 나간 아픔이여서일까. 절단된 단면 위로 내비치는 깜장의 숨결이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태고시절 나무들의 어우러지는 소리가 벌어진 결 사이로 들려온다.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산천초목의 화음을 들으며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미래를 꿈꿨을 참나무의 소망. 평범한 나이테를 가지고 무탈한 생의 소원을 빌었을 나무들의 노래.

불시에 가마에 들어가 숯의 운명이 된 그는 앵돌아진 맘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새긴다. 내리치며 산산이 부서지는 수많은 빗줄기와 눈발에도 꿈쩍 않던 그였지만 뜨거운 불길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제 몸을 시커멓게 태워낸 후 조각나고 벌어진 마음을 몸의 외피에 새긴다. 이미 온 몸의 통각은 한계를 넘어섰다. 불땀에 의해 단련을 받은 그는 새겨져 있던 옹이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겁의 세월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찰나의 삶도 원한 건 아니었다. 어긋났지만 실로 의연하다. 수북이 쌓인 먼지 속에서도 도드라지는 자태를 잃지 않는다. 묻어나는 검댕이에 구박받아도 오로지 깜장 하나로 밀어 붙이는 은근한 그의 뚝심에 할 말을 잊는다. 떨어지는 숯의 파편들조차 새까맣게 저의 궤적을 남긴다. 천하절색의 미녀가 와서 유혹한들 제 색깔을 버릴 그가 아니다.

그의 의연한 기개는 수돗물에 제 몸을 낙하시킬 때 빛을 발한다.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묵묵히 물의 무게를 담아낸다. 뽀얀 먼지를 말없이 씻어 내릴 뿐이다. 그는 일찌감치 삶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었던 거다. 자신을 비워내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환한 대낮이나 깜깜한 밤이나 제 자리를 지켜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를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을.

그리도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얻어진 그의 결에서는 고결함이 느껴진다. 생의 서러움을 뒤로 한 채 이로움으로 명징해내는 숯의 고결함은 결마다 선연히 새겨져 있다. 숯의 결은 켜켜이 물결치며 빈틈을 이루는 여유가 있다. 그 틈 속에서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예리한 결을 이루는 운용의 미를 발휘한다. 같이 또는 따로 결을 형성하는 미학도, 결을 이루는 깊이가 제법 깊어서 부서질 것도 같은데 부서지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붙어 있는 섬세함도 있다. 결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원천적인 힘을 느낀다. 결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 자신의 생이 굴곡져서일까. 미세하게 일어나 있는 결의 가닥에서는 저릿한 아픔까지 느껴진다.

울퉁불퉁 결의 촉감에 남편의 주름이 떠오른다. 남편 생은 결의 연속이었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년시절의 삶은 신산하기만 했다. 새어머니 밑에서의 눈칫밥과 구박으로 남편은 이른 나이에 집을 떠났다. 계모의 핍박으로 한 쪽 귀의 고막이 터지고 나서야 살기 위해 내린 용단이었다.

혈혈단신 타지에서의 삶은 젊은 패기만으로 밀고 나가기에 그리 녹록치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학교를 졸업 후 온갖 고생을 겪고서야 작은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즈음 나와 연이 되어 결혼도 하게 되었다. 가족의 울타리는 남편을 더욱 다부지게 만들었다. 허나 몰아쳐오는 생의 파도는 남편을 가만두지 않았다. 연이은 사업의 부침, 믿었던 사람한테서의 배신, 밀려오는 파도에 여러 차례 패대기 당하면서 남편의 결은 어느새 이마에도 등에도 어깨에도 새겨졌다.

참나무의 미끈한 결은 숯이 되면서 거칠고 벌어진 결이 된다. 수많은 굴곡을 제 몸에 새기는 숯처럼 남편 또한 삶의 파고를 헤쳐 나가면서 생긴 상흔으로 깊이 팬 결을 갖게 되었다. 생의 무게로 인해 반듯했던 결이 굽은 결이 되고 메마른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여러 갈래의 결을 갖게 되었다. 인생의 길과 생의 결이 같은 방향을 향하면서 그려내는 삶의 모습이다. 나는 남편의 그 결을 사랑한다. 굴곡지고 굽이져 있는 결이 아름다운 이유다.

거실장 한 귀퉁이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숯 무더기. 환하게 집안 분위기를 아우르고 있는 그의 자태가 눈부시다. 말없이 품어내고 있는 그의 세상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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