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낙죽장도(烙竹長刀)/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1. 22:56

 

                                          

낙죽장도(烙竹長刀)

 

 

 

황 진 숙

적열의 무게를 견딘다. 인두 끝의 불꽃이 마디의 몸피를 뚫는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날카로움이 온 몸을 관통한다. 그을리며 타들어가는 고통을 그 누가 알랴.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나무는 미동도 없이 제 몸을 내어준다.

낙죽장도는 손잡이와 칼집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 거죽 위에 사상이나 신념을 새겨 넣은 칼이다.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도금을 입힌 칼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바이킹의 울프베르흐트검, 사무라이들의 대도, 징기스칸의 만도 등 세상의 칼들이 밖을 향해 날을 세웠다면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장도는 나를 향해 날을 벼린다. 책을 가까이 한 옛 선비들이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음결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자기성찰의 칼이다.

대나무 마디에 수천자의 글귀와 문양을 새기는 과정 자체가 지난하기에 낙죽은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고행이다.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인두의 화기를 감지해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 인두를 잡은 손과 몸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써 내려가다 보니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가능한 일이다. 만든 이의 혼이 장도에 깃들고 뭉툭한 인두가 피운 글귀들이 선비의 몸에 체득된다.

도포자락에 장도를 지닌 채, 호롱불 아래서 눈을 감고 한시를 외웠을 선비가 떠오른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글귀가 농익고 오밀조밀한 문양이 각인된다. 선비는 칼날을 닦으며 내면의 표식으로 삼았을 것이다. 아슴아슴 돋아나는 양의 기운으로 음의 기운을 상쇄시키고 욕망에 물든 마음을 곧게 펴서 바로 잡았을 것이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칼의 존재감에 장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유리벽 너머에 명암이 드리워지자 칼날이 늠실거린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들이 무리를 이루고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돌칼을 만든 게 칼의 시초였다. 짐승과 물고기를 잡는 야생의 소리, 바람을 가르는 거친 소리, 광활한 대지 위를 표류하는 소리, 생을 영위하기 위한 둔탁한 소리는 인류 최초의 칼의 소리였다. 세기(世紀)가 흐르면서 본성을 거스른 야욕이 칼날에 압착되어 갔다. 서슬 퍼런 칼날은 수백 겹의 철벽으로 퇴화된 시간을 가둬두고 있었다. 약한 자를 누르는 힘이고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습성은 단면에 불과하다. 저를 위해서라면 강철과 연철이 뒤섞이는 혼란도 주저하지 않았다. 영욕에 사로잡혀 천도가 넘는 불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천 번의 망치질을 통해 얻어낸 현란함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이었다.

온몸에 낙인을 짊어진 채 극악한 칼날을 품은 대나무. 대숲의 바람으로 생장점을 키워낸 대나무는 한 자루의 장도가 되기까지 자그마치 십여 년의 세월을 인내한다. 칼날을 지지하기 위해 흠이 없고 단단한 대나무를 채취한다. 그늘에서 뒤집어가며 건조하다 보면 벌레가 먹기도 하고 터지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잘 마른 대나무를 골라 중간 부분을 자른다. 칼날이 들어갈 수 있도록 속을 뚫고 칼몸을 고정시키기 위해 소나무를 채워 넣는다. 천년을 간다는 부레풀로 소뼈와 먹감나무를 붙이면 비로소 칼집과 칼자루가 완성된다.

칼의 뼈대가 완성된 후 칼과 칼집의 만남은 장도를 아우르는 구심점이 된다. 포악스러운 칼날을 상쇄시키며 사색에 잠겨 있는 낙죽장도. 먼 시대를 내려온 불꽃 튀는 언어들이 묵직하다. 무언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고동소리가 둔중하다. 온갖 검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낙죽장도의 생명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지난날, 손톱만한 생채기에 배반이라도 당한 듯한 아픔을 느끼며 독기를 키워왔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사유로 팍팍해진 가슴은 보듬어 낼 줄 몰랐다. 내어놓지를 못하니 스스로를 결핍에 들게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상이 부대끼고 버거웠다. 삶의 구심점이 없었던 탓이다.

옛 선비들처럼 나 또한 장도를 만들며 수행에 전념해 볼 일이다. 어긋나 있던 삶의 마디를 바로하면 옭아맨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음지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세정(世情)에 초연한 낙죽장도의 어법을 익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짓눌려 있던 영혼이 한결 자유로워지리라.

한 자루의 낙죽장도에 새겨진 칼의 문명이 태고 시절의 기억을 전하며 일렁인다. 더없이 찬연한 숨결이 한동안 나를 붙잡고 놔 주지 않을 듯하다.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죽/황진숙  (0) 2021.05.02
종이컵/황진숙  (0) 2021.05.02
식빵/황진숙  (0) 2021.05.01
열애 중/황진숙  (0) 2021.05.01
숯2/황진숙  (0)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