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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식빵/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1. 22:52

식빵/황 진 숙

 

“타닥, 타다닥”

크러스트가 터진다. 파열음이 경쾌하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충분히 부풀어 올라서일까. 오븐에서 나와 세상을 만나는 소리가 선선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과 결대로 찢어지는 속결이 부드럽다. 단련된 시간에서 나오는 유연함으로 말랑거린다. 온몸으로 받아낸 소용돌이 끝에 찾아온 구수함이 사방으로 풀어진다. 그 내음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 덩이의 빵이 머금은 평온에 푸근해진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지만 모든 게 담긴 빵이 식빵이다. 앙금을 들이거나 토핑을 두르지 않아 담백하다. 무명옷을 걸친 듯 수수하다. 가장자리는 떼어지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개명당해도 속없이 하얗기만 하다. 빵가루가 되어 형체 없이 날려도 매인 데 없이 맑다. 달달하거나 농밀하지도 않다. 맹물같이 밍밍하지만 절묘하게 품어야만 나오는 맛이다. 설탕으로 이기려 들지 않고 소금으로 우기려고 하지 않는 버터로 뒤덮으려 하지 않는, 주고받으며 순응하는 그들만의 계율에서 나온다. 서로에게 배어든 호흡으로 마음을 다해 내놓는 진득한 빵이다.

내 삶도 한 덩이로 뭉쳐 빛깔 좋은 빵으로 구워낼 순 없을까.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는 빵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가벼워지고 싶을 때 식빵을 굽는다. 마음을 누르는 일에 갇혀 있다가 맘껏 발산하고 싶은 날, 소박하지만 다독여주는 맛이 그리운 날에 반죽을 만진다.

넓적한 볼에 체에 친 밀가루와 소금 설탕 이스트 물을 넣고 섞는다. 주걱으로 뭉개고 비비며 휘젓는다. 뭉쳐지기 위해 숱하게 부대껴야 하는 게 반죽이다. 처음엔 거칠고 낯설어도 뒤섞이는 사이에 덧정이 든다. 생기와 오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스며든다. 되직하게 덩어리지면 치대기 시작한다. 밀고 당기고 접고 돌린다. 속속들이 다 드러나도록 주무른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를 정도로 얇은 막이 생겨야 비로소 한 덩이가 된다.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그에게 스며들지 못한 마음으로 소리를 내거나 불협화음을 만들진 않았다. 엉켜 있기만 해도 글루텐이 형성되는 반죽처럼 부부란 이름으로 그럭저럭 굴러갔다. 어쩌면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고를 들이지 않았기에 내심 더 편했는지 모른다. 곁에 있었으나 곁이 될 수 없었던 그와 나는 대충 뭉뚱그린 덩어리였다.

매끈해져 손에 묻어나지 않는 반죽 위에 젖은 면포를 덮는다. 이제 발효의 시간이다. 살짝 데운 오븐으로 들어가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차지기 위해 치댔다면 풍미와 결을 위해 부피를 늘리는 일이 발효다. 살아 꿈틀거리는 효모들의 아우성으로 가스층이 생겨야 부드럽고 유연한 결을 얻는다. 밀폐된 공간에서 두 배로 팽창할 때까지 묵상에 잠긴다.

끓어올라 터질 듯한 갈등도 속살거리는 화해도 없었다. 그의 꿈이 나의 소망으로 어우러지지도 그의 상처가 내 아픔으로 번지지도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얽히고설켜 보지 못했으니 부풀어 오를 희망이나 주저앉을 실망이 없었던 것이다. 탄력이 사라진 반죽마냥 제 모양을 갖지 못하고 퍼지기만 했다.

어지간히 부풀었다 싶어 반죽을 꺼낸다. 밑면을 들쳐보니 그물망이 보드랍게 일어선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폭신한 감촉에 잠시 황홀해진다. 서로의 힘을 빌려 맘껏 팽창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지극히 하나 된 일체감으로 찰랑이는 반죽이 생동하다. 뒤집어 두드리며 묵은 공기를 뺀다. 세 덩어리로 분할해 둥글린 후 밀대로 반죽을 민다. 빵틀에 맞게 성형하기 위해서다. 둥글게 말아 이음새를 꼬집어 봉해 준다. 이차 발효 시 생기는 빵의 뼈대와 조직을 위해 확실하게 매듭짓는다. 틀에 맞춤하게 넣고 한 번 더 발효에 들어간다.

시간이 흐르면 발효로 충만해진 반죽은 껍질로 속결로 자아를 찾아간다. 숨겨진 잠재력으로 제자리에 깃드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을 잇기까지 우리의 발효는 참 더디게 일어났다. 차고 넘치는 찰기가 아니라서, 견고하게 잡아주는 끈기가 아니라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호흡으로 그러모아지기까지 수없이 주저앉았다.

마지막 발효가 완료됐는지 손가락으로 눌러본다. 선명하게 자국이 남는다. 구워도 좋다는 신호다. 예열된 오븐에 반죽을 넣는다. 정확한 시간을 위해 타이머를 맞춰둔다. 꾹 누르면 발효점을 알려주는 흔적처럼, 때가 되면 울리는 타이머가 있었으면 한 적이 있다. 미세한 그의 눈빛을 읽고 마음을 헤아려야 할 때, 그와의 거리를 가늠해서 앞장서거나 뒤에 서야 할 때. 굽는 시간이 짧으면 설익고 길면 겉면이 타버리는 빵처럼 숱하게 엇박자를 타고 지나온 시간들이 스쳐간다.

오븐에 들어간 빵이 구워지나 보다. 무심히 흐르는 상념 속으로 고소한 냄새가 파고든다. 가루에서 반죽으로 빵으로 어우러져 제 모양을 보여주기까지. 밀가루와 물로 만나 설탕과 소금으로 섞여 효모로 숙성된 극단의 정서가 향으로 번져온다. 견뎌야 얻어지는 감미로움이 뭉근하다. 시간을 들이고 마음으로 굽는 빵은 쉬이 질리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 서로의 맛으로 견고해지는 부부처럼 물리지 않는 내공이다.

“땡”

타이머가 울린다. 오븐을 열고 갓 구운 식빵을 꺼내 한 입 배어 문다. 살살 녹아 감탄사로 쏟아져 나오는 맛이 순하다. 음미하다 보니 절로 깊어진다. 차오르는 맛이 가슴까지 전해진다. 마주한 그와 나 사이에도 행복을 꿈 꿀 만큼, 보듬어주는 순백의 맛으로 스며든다. 그 위로에 살며시 마음을 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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