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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선을 긋다 / 우광미

에세이향기 2023. 4. 30. 18:23

선을 긋다 / 우광미






 
 
선 긋기는 다양하다. 연필심의 굵기나 강도에 의해 선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선의 방향에 따라 무게감도 달라진다. 소묘를 할 때는 화지 위에 전체 크기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비율을 관찰하고 중심점을 확실히 잡는다. 처음엔 연필을 눕혀서 묵직하게 선을 깔아준다. 그 위에 계속 얽히고설키게 선들을 쌓아 밑그림을 만든다.
이렇게 성실히 메우고 다듬어 나가면서 수시로 뒤로 물어나 자신의 그림을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 한 곳만 크게 보이던 것도, 거리를 두고 보면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전체의 톤을 염두에 둔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면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도 가질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림들은 모두 그런 사람을 닮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일 접하여 자신의 내부가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일까. 굳이 이름을 보지 않아도 각자의 차별화된 성향은 개인의 특성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길들여지지 않는 그들의 개성이며 생명력의 발로일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정확한 명암과 동세(動勢)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표현하기는 더욱 어렵기에 스승의 그림을 외워서 그리기도 한다. 그런 의존이 심하면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이 붙지 않는다. 수없이 관찰하고 때로 자신이 오류를 범한 뒤에야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들이 모여 일체가 된다. 그 단면을 확대해 보면 선들의 교차다. 때로는 직선의 날카로운 연필 자국이 있기도 하고, 잘못 들어간 명암을 지우개로 지워 보려다 뭉개져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선의 강약으로 나아가 그림자를 넣어주면 곡면(曲面)이 되고 입체가 된다. 삶도 자신이 정해둔 중심점을 향해 만들어 놓은 평면을 입체로 다듬는 작업일지 모른다.
사람 됨됨이도 이 선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기에 어느 사람은 선이 굵다.’, ‘그와의 사이에 선이 닿아 있다.’, ‘그들과는 선을 긋고 산다.’등의 말이 가능하다. 선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지난 삶의 흔적일 것이다.
문을 여니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맛집 정보를 보고 찾아왔다. 뜻밖에 찾아온 친구와 가깝게 식사하며 차를 마시기에는 제격인 듯싶다. 연락하지 못하고 산 세월이 긴 친구.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의식은 또래들보다 어른스러웠었다. 셈도 잘하고 친구들 전화번호도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연락이 끊긴 후 찾아와 준 반가움에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러자 테이블 위로 가지고 온 화판을 올려놓았다. 그 속에서 여러 사이즈의 그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고 판매용었다.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던 친구가 그림을 팔려고 바뀐 나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다니. 전체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에만 매여 있다가 이제야 뒤로 물러나 주변과 더불어 살아감을 인식한 것일까.
우리는 학창시절 같은 화실에서 소묘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진학과 동시에 집의 후원으로 입시 미술학원을 차렸고, 마침내 응용미술 족집게 강사가 되었다. 많은 합격생을 배출시켜 성업을 이루었다. 그 당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회화 쪽보다는 졸업 후 취업의 기회가 다양한 응용미술 쪽으로 눈을 돌렸었다. 짧은 시간 그의 수업을 듣고 디자인 유형을 외워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시험 당일 쓸 물감의 색상들도 배합해 미리 준비해 갈 정도로 여유를 가졌었다. 시험날 출제의원은 실기 제목을 칠판에 적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공식화된 문제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문제로 느닷없이 바뀌었다. 암기는 내성이 생기는 진통제일지 모른다. 자신의 창의성까지 잃게 하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제목은 내 머릿속 생각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고, 밑그림을 충실히 채우지 않고 그림자를 넣은 것처럼 텅빈 것이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 곳엔 애초부터 중심점이 없었다.
중심점을 잡지 않은 그림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중심점은 삶에도 있었다. 가장 핵심이었다. 결국 그의 화실에 학생들의 발길도 점차 끊겨 문을 닫게 되었다. 모든 일은 기본이 중요하고 성실함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내 지난날에 흔들리고 가벼워서 움직였던 시간들을 돌아본다. 사는 일도 수없이 교차된 작은 선들이 중심점을 향해 메워져 간다. 평범한 선들의 교감이 모여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친구의 명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난날 잘못 그은 선들이 떠올랐다. 지금 나의 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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