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마을에서 / 허창옥
네 손가락을 펴서 돌담을 만진다. 그런 채로 천천히 고샅을 걷는다. 손이 두툴두툴한 돌담을 죽 훑으며 내 느린 발걸음을 따라온다. 손끝에 아주 낯익은 감촉이 와 닿는다. 이 촉감, 꼬맹이 적 우리 동네 안 골목 그 돌담들 이후 얼마만인가.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린다. 싸리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하오의 그늘이 마당을 반쯤 가리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다. 낮은 처마 밑에 느슨하게 묶인 빨랫줄에 낡은 타월이 걸려 있고 고무 함지막이 화단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화단에는 맨드라미 봉숭아 분꽃들이 원래 제자리가 없었던 듯 자연스럽게 뒤섞여서 피어 있다. 부엌 앞 귀퉁이에는 장독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옆 개집에는 할 일을 잊어버린 개가 멍청하게 앉아 있다. 벼논인지 텃밭인지에서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가 보다.
하릴없이 돌아 나와서 다시 골목길을 걷는다 이미 그 쓰임새가 폐기된 듯한 낡은 경운기가 버려진 듯 놓여 있다. 대나무로 엮은 삽짝이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걸까. 툇마루의 기둥에 오래 찢겨 나가지 않은 빛 바랜 일력이 걸려 있다. 해가 지겠다고 갈 길을 서두르건만 나는 못들은 척한다. 이 촌락에 더 있고 싶어 버틸 만큼 버텨 보겠다는 심산이다.
낙안읍성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잠시 행복하다. 초가집들, 돌담, 고샅길, 낮은 대문 안으로 들여다뵈는 적요가 어우러져서 꿈 속 같은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낙안 민속마을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재현되며 관리하는 역사적 의미가 큰 관광명소이다. 휴가철에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문명의 때와 잇속이 이 마을 고유의 아름다움과 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어느 정도 손상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간 나에게는 그냥 고만고만한 이웃들이 도란도란 모여 사는 오래된 마을로 느껴질 따름이다. 골목엔 새까맣게 그을린 학동들이 뛰어놀고, 들에 나간 남정네들 지게 지고 고샅을 들어오며 굴뚝에선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 나올 것 같은 그런 정겨운 촌락일 뿐이다. 그 어디쯤에서 나도 오래 전에 살았던 여자처럼 앞치마에 젖은 손 닦으며 지아비를 맞이하는 아낙네로 살고 싶다. 부엌문 열고 나오는 키 작은 아낙을 그려본다. 정말이지, 몇 백년 거슬러 올라가서 착하고 다소곳하며 살림 손끝 야문 참한 여인네로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 오래된 마을에서 오래 전에 살았을 한 여자를 스스로에게 투영해 보는데 슬픔인지 기쁨인지 형언할 수 없는 정감이 가슴 가득 번진다. 그 마을 그 여자가 그립다.
해가 설핏해졌다. 성밖으로 나가야겠다. 문득 왼손에 들고 있는 솟대모형을 의식한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 성밖의 한 가게에서 샀다. 대나무 가는 가지 끝에 다섯 마리의 나무 새를 앉힌 예쁜 솟대이다. 평일이라 어지간히 조용했나 보다. 주인은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았다. 목각 공예품들과 쥘부채 같은 한지 공예품들이 진열된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여자가 백설기를 떼어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남편은 나무로, 아내는 종이로 민속공예품을 만든다는 그 부부는 이곳에 여행 왔다가 눌러앉았으며 곧 성안에 집이 마련될 거라고 말했다. "그래, 적적하지 않겠어요?" 내 물음에 여인은 그저 웃기만 하였다. 서울말을 하는 젊은 여성이 택한 새로운 삶에 내 마음은 우려 반 격려 반이었다.
"잘 사세요."
짧은 인사로 헤어졌다. 그 여인을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아린다. 모시 개량 한복 곱게 입은 정갈한 모습의 미인이었다. 아주 특별한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의 방편으로 이곳을 택했을지라도 여기에서 그 부부가 참으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 이 집이야. 깨어진 도자기를 쪼르르 박아서 테두리를 만든 화단에 키 작은 화초들이 올망졸망 피어 있는 아담한 집이다. 이 집에서 그들이 살았으면.... 여름밤, 장지문 열어 놓고 마주 앉아 나무를 다듬고 종이를 만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그려본다.
오래된 마을에 서 있는 동안이나마 나는 오래 전에 살았던 여자로 있고 싶다. 저 성문을 나서는 순간 환상은 깨어지고 말겠지.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부여잡고 있느라 제풀에 지치고 무너지는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오늘 나는 오래 전에 살았던 순박한 여자를 내 안에 품고 간다. 살다가 마음이 갈 길을 잃으면 그 여자를 불러내서 순한 눈빛 마주하고 나직나직 불러보리라.
땅거미 내리는 낙안 마을 초가집들을 바라보며 성문을 향해 나는 뒷걸음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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