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 가난처럼 쓸쓸한 눈매를 하고서는 사과 몇 알씩을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과를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흡입했다. 온돌을 데워 가난을 눕히고 싶었다. 짙은 향기가 방안을 장식했다. 해가 저물고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면 푸른 달빛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발을 묶은 어둠은 방문 앞까지 와서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남자를 닮아 선량한 눈매며 도톰한 입술을 가진 아이 하나 낳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많은데 간절히 바라는 그녀만 외면당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소원은 눈물을 머금고 크는 것이라.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다. 새벽이슬을 옴팡 뒤집어쓰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인적 드문 산사를 찾아가 돌부처의 코를 몰래 갈아와 마셨다. 몸과 마음이 지쳐 쓰러졌다. 한 번도 잉태하지 못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은 귓가에서 소용돌이치더니 물살처럼 투명하게 울리며 하늘로 아득히 높아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청걸음으로 치맛자락을 밟으며 언덕을 올라갔다. 하늘엔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다. 채워지지 않아 구멍 나 있던 그 가슴으로 보름달이 푸르게 비쳐들었다. 달빛이 출렁거리자 간절함이 저절로 끓어올랐다. 달빛 아래서 가슴을 터놓았다. 투명한 보석처럼 달빛과 밀착했다. 몸속 깊이 들어와 빛으로 가득 채워주길 바라며 몸을 열었다. 단전에 힘을 모으고 달의 기운을 흡입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궁은 작은 달, 여인의 몸은 달의 정기의 탯줄이 달려 있어 달마다 새롭게 정혈을 모아 보름달처럼 차오르면 쏟아버린다. 그것을 쏟아버리지 않고 모아두어야만 생명이 만들어진다. 달의 정기를 한껏 들이마셔 몸속에 그대로 머물게 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둥그런 보름달처럼 그녀도 환한 달빛을 품에 안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 캄캄한 밤 같다 하여 그믐이라 불렀다. 그믐날은 달이 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 숨은 것이다. 찼다 이울었다 하는 달이 먹통 같은 그믐엔 지하에서 혼자 만월이 되어 조금씩 차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그녀도 달과 같이 호흡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칠흑 같지만 언젠가 지상 위로 떠올라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만월을 꿈꾸고 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소문은 금세 살이 붙어 통통해졌다. 남의 남자를 빼앗아와 벌을 받는다느니 씨를 만들지 못해 버림받은 남자와 산다느니, 하룻밤 사이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기도 했다. 부질없는 소문처럼 그녀에게도 철마다 계절이 바뀌어 비어있는 가슴을 달빛이 대신 채워주었으면 했다. 옹이가 박힌 그 자리에 수도 없이 들락거리는 바람을 재우는 일은 달을 품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굳이 아들을 낳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뱃속에 열 달 동안 품을 수만 있다면 만족했다. 그저 자식 하나 두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몫으로 주어지는 긴 생을 반으로 잘라 하나의 생명과 바꾸고 싶다.
그 남자, 대문간에 사과 한 알 두고 돌아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자동차에 몸을 구겨 넣더니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뒤통수에 대고 고함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초저녁부터 무슨 흉흉한 꿈일까. 생생한 꿈속을 더듬으며 그녀는 마당으로 나왔다. 공중엔 달빛이 가득했다. 장독대 앞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이 피부에 닿자 소름이 끼쳤다. 시린 빛 한 줄기가 그녀의 등을 스윽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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