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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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내외담/황미연

에세이향기 2023. 12. 27. 03:40

 

 

내외담 
 
황미연 
 
 
사랑채는 고요하다. 오수에 빠진 햇살이 다리를 죽 뻗고 누워있을 뿐 찾아드는 손님은 없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범절 있는 사대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未)시가 한참 지난 후였다. 사랑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읽고 있던 규방가사를 덮어두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내외담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였다. 손님상을 차리려고 과객인지 벗인지 종친인지 살펴보았으나 손님은 이미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올라서고 있다. 옥색 도포를 입은 뒷모습이 마치 지난번에도 며칠 묵고 간 적이 있는 그 사람 같다. 
 
외출하려고 막 대문을 나서다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와 부딪쳤다. 깜짝 놀라 손을 놓치는 바람에 장옷이 벗겨져 땅으로 떨어졌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만 커다랗게 뜨고 서 있는데 그가 덥석 주워들고 내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묵례를 하더니 사랑채를 향하여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그다지 크지 않은 덩치였다. 말간 얼굴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보는 순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지아비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 없는데 외간 남자를 바로 턱밑에서 보았으니 민망하
기 그지없었다. 꿈을 꾼 것 같았으나 꿈은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저녁을 짓다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지다 밥그릇을 떨어뜨렸다. 대문간에서 부딪쳤던 그의 모습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손님으로 오는 날이면 괜히 두근두근했다. 담 너머에서 헛기침만 해도 구멍 사이로 내다보며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엄연히 지아비가 있는 여인이 낯모를 남자를 마음에 품다니. 더군다나 지아비의 오랜 벗이라니. 허락도 없이 마음에 들어와 무시로 우듬지를 흔들어댈 때면 친정에 세워진 열녀문의 홍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가문을 중시여기며 단정한 몸가짐을 하라는 무언의 압력 같았다. 
 
낯선 마음을 떨쳐내려고 수없이 도리질했다. 사랑채에 인기척이 나면 행랑어멈보고 살피라고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달려가서 그가 왔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자라나는 욕심을 잘라야 했다. 과묵하던 지아비가 손님 대접하느라 고생이 많다는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뜨끔했다. 
 
안개도 없이 뿌연 날 저녁 무렵에 그가 사랑채로 들어왔다. 지아비는 종친회에 가고 없는데 난감했다. 남녀유별이지만 사랑채로 나가 몸을 옆으로 돌려세운 채 인사를 나누었다. 곁눈으로 슬쩍 본 그의 얼굴은 걱정이 서린 듯 어두워 보였다. 사랑채 주인은 출타 중이지만 사정이 있어 그러니 실례를 무릅쓰고 하룻밤만 묵어가겠단다. 눈빛이 하도 간절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다른 날 보다 더 정성을 들였다. 마른 황태를 삼베 보자기에 싸서 비벼낸 보푸라기를 참기름에 버무렸다. 끓는 물에 계란을 넣어 수란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밤이 깊었는데도 사랑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서책을 읽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이 꺼질 때까지 안마당을 서성거렸다.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것
같은 별빛 사이로 백조자리가 보였다. 가까이에 거문고자리의 직녀성과 독수리자리의 견우성도 있다. 그를 두고 백조의 날개를 다리 삼아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견우와 직녀를 생각했다. 가당치도 않은 생각에 머리를 흔들자 구름무늬를 수놓은 신발 위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사랑채 댓돌 위에도 내려앉을 것이라 생각하며 버선 속에 감춰진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몸속 어디선가 전율이 이는 것 같았다. 
 
햇살이 방안으로 들어와 나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밖에서는 아침을 맞는 소리들로 분주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사랑채로 나가보았다. 댓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가버렸는지 떠나고 없고, 자리끼 옆에 편지 한 장만 남겨져 있었다. 
 
안마당에 활짝 핀 꽃, 이름이 무엇이오
그 향기 그윽하여 밤잠을 설쳤다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두드리고 싶어 주먹을 쥐었지만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가슴에 닿지 않았다. 어쩌다가 마음을 빼앗겨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덜컥 겁이 났다. 행랑채 아이가 소제하러 들어오기 전에 얼른 치워야 했다. 
 
치맛자락에 편지를 감추고 안방으로 돌아와 문고리를 걸었다. 어젯밤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렸을 때, 그 미묘하던 전율이 담을 넘어온 그의 마음이었단 말인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편지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점점 타올라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때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나온 그 무엇인가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길은 한데 어우러져 하얀 목덜미를 핥았다. 한동안 뜨겁게 춤사위를 벌이더니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몇백 년의 침묵을 깨고 나온 한 여인을 만난 것 같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나직하고도 담담하게 들려준 것 같다. 아녀자들에게 내외담 구멍은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손님상을 차리기 위해서였다지만, 억압된 생활 속에서의 숨구멍은 아니었을까. ‘신도 통제하지 못한 호기심은 권력도 길들이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곳을 통해 생겨나는 호기심과 질문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에 손으로 툭 쳐보지만 오래된 금서인 내외담은 꿈쩍 않는다. 가을볕에 누렇게 말라가고만 있을 뿐이다. 
 
 
황미연의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