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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에세이향기 2023. 12. 27. 03:35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다 말할 수가 없다. 사실은 할 말이 많아서 그렇다.

아름다워도 '말할 수 없이'라고 하고 가슴 아파도 '말할 수 없는'이란 수식을 붙이지만 나는 그런 뉘앙스와는 비껴나 있다. '말을 다해봐야 뭐가 좋다고…'라는 뜻에 가깝다.

햇살이 기분 좋을 만큼 따스하고 창밖엔 가을 풍경이 가득하여 장의차 안에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잠시 잊고 있었다.

차창 밖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분이 두 손을 배 앞에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두 번인가를 한다. '아, 우리 차를 보고 그러는구나. 옛날 예의 법도인가 보다.' 망자와 천붕지통을 앓는 가족을 향한 절인가 보다. 모르는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인 그분의 숙연함이 따뜻하게 전해왔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 시골길을 달리자 노랗게 익은 벼와 인삼 밭이 보였다. 자칫 반색을 드러낼 뻔했다. 햇살과 바람을 먹고 사는 많은 동식물에 비하면 볏짚으로 만든 지붕 아래서 햇살과 바람을 피하여 사는 인삼을 키우는 인삼 밭이다. 종삼은 농부가 공들인 땅심을 믿고 줄기를 올리고 열매를 맺고 뿌리는 숨어서 5, 6년간 큰다. 그늘막이 걷어지고 긴 세월 마디게 키워낸 15~20센티 정도의 몸이 뽑혀 나오면 '인삼이 이래서 인삼이구나.' 한다. 경건하고도 쑥스러운 탄생처럼 보이는 건 생김새도 그렇지만 숨어 살아온 세월 때문일 것이다. 습도에 예민해 썩기 쉬운 인삼이 그늘막이 쳐진 땅속에서 오랜 세월 잘 버티어 면역력에 좋은 사포닌 성분을 지닌다.

인삼밭이 쓱쓱 버스 뒤로 달아날 때 나는 이곳을 지나는 이유를 또 잊고 있었다. 그렇지, 나는 친척들이 누워있는 선산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있었다.

금산 사람들은 인삼밭 근처에서 애를 낳고, 인삼을 키워 그 돈으로 자식을 키우고, 도시로 내보내고, 노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지내며 살았다. 인삼 농사를 짓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큰할아버지 고모할머니…. 잠시 다른 고장으로 흩어져 살던 친척들도 총총 장의차를 타고서야 인삼밭이 천지인 이곳 선산으로 모여들었다. 아버지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타지로 나가 외로운 사춘기를 보냈다. 혈육의 땅이었지만 아버지가 기어이 떠나온 땅이었는데, 80년이 지나 돌아가고 있었다.

편안했다. 웬일인지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인삼밭이 있는 이곳으로 오자 어릴 적 평온함이 반가워서 그랬는지 할아버지 댁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랬는지 내 맘속의 원망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노를 저어 건너갔던 강은 그대로인데 버스는 다리 위로 건너갔다. 강물이 반짝였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니 강물은 더 빛나 보였다. 아름다움은 산 자의 독점권이라 나눌 수가 없는데 오늘은 함께 느낄 것만 같았다.

어렸을 적 인삼을 깎은 적이 있다. 동네 아낙들도 수십 명 모여앉아 앞자락에 삼베 천 조각을 깔았다. 대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은 칼의 옆선이 칼날이다. 인삼의 표피를 벗겨내는 작업은 강약을 잘 조절해야 하는 연애의 법칙과도 같아서 조심스럽고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사람처럼 생긴 인삼이 행여 다칠세라 대나무 칼로 살살 벗기면 뽀얗게 속살이 드러났다. 잔뿌리 구석진 곳도 소중히 들춰 문질렀다. 손실이 없게 하는 일이 중요한데 나에겐 잔뿌리를 모아 집 밖에 서 있는 엿장수의 엿과 바꾸는 재미가 더 중요했다. 껍질의 잔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삼베를 축축이 적셨다. 삼베가 인삼 껍질에 물들어 갈색이 되어갈 즈음 다리가 저렸고 바구니엔 벌거벗은 인삼이 수북이 누워 있고 무릎 위엔 부스러기와 부러진 잔뿌리가 널브러졌었다.

그렇게 큰댁에서 지냈던 시간이 좋았다. 방학을 이용해 놀아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서 좋았던 거다. 큰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인자하셨다. 배움의 끈은 아버지보다 짧았지만 깊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어린 마음에, 거칠게 표현해도 분명 사랑일 거라고 많이 믿어봤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없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아버지도 우리가 대학에 들어갈 즈음 인삼 농사를 지었다. 도시에서 공무원 봉급으로는 다섯을 키우기 힘드셨는지 엄마를 앞장 세웠다. 두 분이 나란히 일요일 새벽 대문을 나설 때면 좋았다. 아버지가 엄마랑 협심하는 것처럼 보여 좋았고 나는 화가 나서 도서관으로 달아나지 않아도 됐다. 종일 대청마루를 차지하고 마당을 쳐다봐도, 공부를 해도, TV를 봐도, 행복했다. 비가 와도, 햇살이 쏟아져도, 흐려도, 가슴 졸일 일이 없어서 행복했다. 나는 아버지의 봉급과, 인삼을 수확한 돈들이 우리의 대학 등록금과 용돈으로 다 들어갔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싸움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일요일 낮이 좋았다.

결혼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방법이었다.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이 다른 부드러운 남자를 택했다. 사윗감이 맘에 드셨는지 그 해 수확한 인삼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담근 인삼주를 주셨다. 귀한 거였지만 나는 그 독한 것을 어쩌지 못해 구석에 넣어두었다. 이사할 때마다 조심스러웠을 뿐이다. 이제 35년이 넘었는가. 아직도 마셔볼 엄두를 못 내는데 아버지는 가셨다.

아버지의 재를 담은 항아리가 땅에 들어가고 흙을 한 삽씩 뿌리고 밟았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의 구절초는 예쁘게도 피었다. 꺾어 비석 옆에 놓았다.

“아버지, 왜 그리 화를 내시며 사셨나요? 이제 화 안 나고 편안하시죠? 이제 화낼 일 없으실 거예요." 나는 말이 편안하게 술술 나왔다. 술잔을 올리고 돌아보니 아래쪽으로 인삼밭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술과 성질로,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산 노고를 허무하게 바꿔치기해버렸다. 거친 말은 엄마와 우리들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해서, 아끼고 숨겨둔 애정 모두를 엎어버리게 했다. 가끔 전화를 거시곤 했다. "잘 지내냐? 술 한잔해서 전화했다 허허."

그 후 술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오랜 세월 동안에도 "나이 들면 성질도 죽는다더니 다 그런 것도 아니더라."라며 한숨소리 내뱉는 엄마의 표정은 자식들 가슴을 참 미어지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신 곳, 그곳은 이제 맘에 안 드는 것이 없는 편한 세상일 것이다.

선산을 내려왔다. 윤기 자르르한 도토리가 눈에 띄고 또 띄었다. 엄마는 줍고 또 주웠고 장의차 기사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면 외로움과 모든 걸 바꿀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었던 많은 심정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기억을 무엇과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것과 바꾼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아버지가 편해진 것 같아 말할 필요도 없어졌다.

어쩌면 그리움이란 단어가 깊은 아픔을 뚫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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