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
김현숙
저는 매일 도둑질을 합니다. 말 그대로 남의 것을 탐낸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 줄도 알고 그러면 안 되는 줄도 압니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욕심내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회성 말들입니다. 쓸 만한 게 많아서 주섬주섬 가져오다보니, 제 머릿속과 책상 위는 늘 포화상태입니다. 정리하지 않고 며칠 그대로 쌓아두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때로는 그 일회성이라는 것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동네마트에 갔더니, 신선코너 담당인 박주임이 마이크를 잡고 이러는 겁니다. ‘자 세상살이 우리만큼 아는 애호박이요. 오늘은 특가로 나와 앉았네요’ 말씀 참 맛깔나게 하시지요. 애호박이 세상사는 맛을 안다는 얘기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박주임은 그날 그 멘트 하나로 애호박 엄청나게 팔았을 겁니다.
이런 말들이 단발성이 되는 게 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슬쩍 훔쳐와 준비 중인 글머리에다 이런 식으로 얹었습니다. ‘저녁 찬거리가 애매해서 집 앞 마트에 갔더니 신선코너 박주임이 세상맛 다 안다는 애호박을 팝디다’ 이렇게 가져다놓기만 하면, 그때부터 애호박이 알고 있다는 그 세상살이가 저절로 궁금해집니다. 판매대에 진열된 그것이 여사로 안 보입니다. 결국에는 ‘저와 나의 한 살이가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싶은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또 내 것(글)이 하나 생기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 그런 말들을 일회용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일입니다. 딴에는 글 좀 쓴다고 뻐기는 선배가 한번 보자기에 제 글 하나를 들고 나간 적이 있었죠. 말없이 쭉 훑던 선배가 대뜸 “야, 인마 이 ‘추자’ 타령 내 거잖아. 이러면 위법이지” 하는 겁니다. 지난 정기모임 때 막걸리 집에서, 선배가 별 생각 없이 흘린 이야기를 제가 주머니에 몰래 넣어 왔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쓸 만하다 싶었는지 버려놓고는 이제 와서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억지를 쓰면서 펄쩍뛰는 흉내까지 내기에 “나 참 그럼 선배가 좀 써보시든지 맨 날 정의가 물에 빠졌네, 도덕이 익사했네, 하는 밑구멍 빠진 글만 쓰지 말고” 하면서 막 쏘아 줬습니다.
내로라하는 기자면 뭐합니까.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진짜 제 속마음인지도 모르고 살면서 말입니다. 허구한 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헛것만 좇고 살면서, 사람을 좀도둑 취급하잖습니까. 전 그 선배 입에서 나오는 얘기나 말들이 아까워 죽겠습니다. 통째로 다 훔쳐 오고 싶습니다.
사실 제 도둑질은 어느 정도는 내림입니다. 엄마는 지금도 식구들 생일이면 직접 손 편지를 써서 주십니다. 면구스러운 모정을 드러내거나 잘 태어났다는 식의 축하메시지는 없습니다. 지난 남편생일에 엄마가 주신 편지 내용입니다. ‘자네, 내가 뉴스에서 봤는데 말이야. 이젠 바람나도 콩밥은 안 먹게 생겼데, 김 서방 자네는 어찌 생각하시노. 내 딸이 끓여주는 쇠고기 들어간 미역국 먹으면서 잘 한번 생각해보시게. 미역 값은 내가 좀 보탬세’ 물론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알아채셨겠지만 엄마는 재밌고 유쾌하십니다. 경로당에 고스톱 치러가서 들은 얘기나, 텃밭에 나갔다가 본 장면들을 잘 기억해뒀다가 식구들 생일편지에다 하나씩 써 먹는 겁니다. 명절날 아침에 덕담으로 해 주시는 말씀도 대부분 그런 식입니다.
전 엄마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좋습니다.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하는 얘기들을 제가 싹 쓸어옵니다. 원래 딸들이 다 도둑 아닙니까. 저는 여느 딸들처럼 친정 된장이나 고추장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엄마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의 모양과 냄새, 색깔들이 그런 살림밑천보다 더 탐이 납니다. 특유의 낙관적 정서가 깔려있는 엄마의 말에는 유쾌한 힘이 있습니다. 귤껍질 하나를 벗겨도 엄마는 다릅니다. “아따, 고년 어지간히 꽁꽁 싸맸네. 그래 오늘이 네년 머리 올리는 날이다”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를 엄마에게 새로 배웁니다. 그 옛날 기역, 니은 따라 적으며 글자 깨치던 마음가짐으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옆에 엎드려 정신없이 당신 말을 받아 적을라치면, 엄마가 제 머리를 한 번 쓰윽 훑으십니다. “국민 학교 겨우 나온 내 소리가지고 그 볼펜 약값은 빠지겠나” 볼펜 약값이요. 그게 대수입니까 엄마. 대학공부 다하고도 남의 말이나 탐내고 사는 이 마음 가난한 딸년은 어쩌고요. 또 그 죄 값은 어떡합니까, 엄마.
그렇다고 해서, 제가 영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열두 명의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최후의 만찬’에 든 그분 심정처럼 측은지심이 생깁니다. 제 글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입말이나 행동묘사들은 거의 그 녀석들에게서 훔쳐온 겁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루는 양심선언 비슷하게 하고 저희들 재료 삼아 쓴 글을 읽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몸을 젖혀가며 깔깔대는 겁니다. 참, 아이들 맞죠. 이러니 어떻게 제가 양심이 안 찔리겠습니까. 죄 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루쉰의 삶과 사상] 이라는 책의 머리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책을 배우는 것보다 사람을 배우는 것이 훨씬 쉽다. 쉬울 뿐 아니라 사람 배움에는 가슴에 와 닿는 절절함이 있다. 이것은 책에는 없는 것이다. 한 그루 나무가 그 골짜기의 물과 바람을 제 몸 속에 담고 있듯이 사람의 삶 속에는 당대 사회와 역사의 자취가 각인되어 있다. 사람 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 사회성과 역사성은 책 속에 정리되어 있는 사회적 분석이나 역사적 고증에 비하여 훨씬 더 친근하고 생동적이다’
왜 책이라고 없겠습니까. 책이라는 것이 틀림없는 현실의 지식이기는 합니다. 지혜의 보고(寶庫)도 맞습니다. 다만, 그 지식이라는 것이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의 모습과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실존적 무게감이 적게 느껴진다는 말이겠지요. 전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수필을 쓰는 제 입장에서는 루쉰의 그 말이 적지 않게 공감이 갑니다.
수필을 쓰면서 알았습니다. 내 글에서 드러난 모자라고 부족한 점은, 내가 살아가는 삶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었어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마트 진열대의 애호박은 그냥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식재료일 뿐이었겠죠.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은 아마 모른 채 살았을 겁니다. 세상살이를 냉동고 속 얼어붙은 인스턴트에게 배우며 살 뻔 했습니다. 평생 수필이라는 수의(囚衣)를 입고 죄인으로 살더라도 저는 이 도둑질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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