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 송혜영
어찌 저리도 크고 원만하게, 온화한 빛으로 잘 늙었을까. 황혼의 호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호박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종묘상 앞이나 장터 난전에 모종이 나타난다. 땅이 일 년 농사를 허한다는 신호다. 어서 밭에 가자고 성화를 하는 모종 중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호박이다. 일단 울 밑에 심을 호박부터 챙겨놓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속을 보태는 건 호박이 밭작물 중에서 으뜸이어서이다.
호박 모종은 잎이 세 장 정도 나와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갓 젖 떨어진 정도의 어린잎이지만 스스로 생존하기에 모자람이 없이 오롯하다. 용수철 같은 넝쿨은 당장 내 손끝이라도 잡고 올라올 기세다. 어린 저것이 뿌리를 내리고, 땅심을 받아 잎이 무성해지고,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호박꽃이 벌·나비와 살을 섞고, 그 사랑의 흔적인 작은 돌기가 맷돌만 해지는 걸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경이로운 성장은 하늘과 땅의 조화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몸집의 크기로 따지자면 시퍼런 수박도 호박 못지않게 대견하다. 수박의 머리통을 가끔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호박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뚜덕이는 손길에 더 애정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몸이 찬 편이라서인지 열을 식혀주는 수박보다 몸을 덥혀주는 따뜻한 기질의 호박에 절로 끌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존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그 어느 밭작물보다 적극적으로 몸을 불리는 것도 칭찬할만하다. 베풂과 나눔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호박의 남다름을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수박 한 통 잘랐다고 이웃에 들고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호박죽을 끓이거나 호박범벅을 만들면 내 가족이 아닌 남을 배려할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것도 시끌벅적 유복한 집보다는 애옥살림의 고적한 밥상을 더 챙기게 된다.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후하고 심성이 따뜻한 호박이 시키는 일이다.
세 계절을 관통하는 동안에도 호박은 그저 몸통 불리기에만 급급하지 않는다. 품이 넓은 잎사귀로도 인간에게 보시를 한다. 빨래 주무르듯 치대서 부드러워진 호박잎을 뜯어 넣고, 들깻가루로 뽀얗게 국물을 내 끓인 된장국은 여름 밥상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푹 찐 호박잎을 손바닥에 보자기처럼 펼치고, 풋고추 송송 썰어 넣고 총총 다진 멸치젓을 밥에 얹어 싸 먹는 호박잎 삼의 맛은 찜통더위와 땡볕, 물것들의 극성을 긍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찬바람머리에 들 때쯤이면 호박이 여물어간다. 바야흐로 성장의 압박에서 벗어난 호박이 내실을 다지는 기간이다. 대개는 호박이 앉은 자리를 미리 알고 실팍해진 엉덩이에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준다. 오며 가며 구순하게 익어가는 호박에게 흐뭇한 시선을 보낸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잘 익은 호박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꼭 잃어버린 자식이 헌헌장부가 되어 부모 앞에 나타난 것처럼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늦가을 따가운 햇볕과 서늘한 밤기운에 호박은 그예 늙어간다. 잘 늙은 호박은 초벌구이를 한 옹기의 색과 비슷하다. 황금들판과도 닮았고 노을빛이 물든 것 같기도 하다. 호박은 만물은 바로 황혼 무렵이 숙성의 시기라고 몸으로 말한다.
서리를 서너 번 맞고 나면 호박을 젖줄이었던 땅에서 분리시킨다. 나잇값을 하는 음전한 호박은 밭을 떠나도 수박처럼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다. 호박을 대하는 방식에서부터 수박과 다르다. 단번에 쫙 갈라 붉은 속살을 허겁지겁 탐하고, 혈흔이 남은 채로 쓰레기 양을 늘리는데 기여하는 수박과 격이 같을 수는 없다. 호박은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집안에서 제일 높은 시렁에 모셔놓는다. 그건 일종의 노장에 대한 예우다. 야지에서 보낸 인고의 세월에 그렇게 예를 갖추고 겨울이 깊어갈 때쯤에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들고 시렁에서 내린다. 그리고 박을 가르기 전 간단한 의식을 치른다. 금강소나무를 베기 전처럼 "어명이요!" 외쳐 양해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목례를 한다.
호박은 쉽게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동물의 탯줄은 굳으면 철사줄보다 질기다고 하던데 호박의 꼭지도 그 못지않다. 칼을 받아들이지 않는 꼭지 부분을 바깥으로 둥그렇게 도려내고 난 다음 연한 살이 얼추 드러난 곳에 칼을 대고 밑으로 힘을 줘야 한다.
호박을 가를 때는 매번 긴장한다. 이물질 없이 샛노란 박 속을 보여줄 때는 흡족하지만, 속살 사이에서 하얀 애벌레들이 얼굴을 내밀면 여간 심란한 게 아니다. 박 속에 오글거리고 있는 그들과 대면했을 때 처음에는 징그러웠다. 애써 키운 걸 가로챈 그놈들이 꽤나 밉살스러웠던 건 그다음이다.. 외려 주인 행세를 하며 침입자에게 저항하듯 톡톡 튀어 오르는 그것들이 가당찮기도 했다. 호박이 아직 여릴 때 작은 벌처럼 생긴 호박과실파리가 침으로 호박 속에 알을 낳은 것이다.
작년에도 며칠 약식은 족히 될 호박을 그놈들에게 또 뺏겼다. 분김에 벌레와 함께 두엄더미에 던져버렸다. 손을 털고 돌아서는데 어째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사실 분통이 터지기로는 나보다 그들이 더하지 않겠는가. 하루살이 눈알보다 작은 알에서 이만큼 오동통하게 살을 찌웠다. 겨울 양식은 보장되어 있겠다. 이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날개를 달고 산으로 들어갈 텐데. 저 무자비한 인간이 우리의 생존기반을 송두리째 부숴 버리다니. 분기탱천해 톡톡 튀어 오르는 과실파리 새끼들의 원성이 귓가에 쟁쟁했다.
호박은 내가 심었으니 분명히 내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호박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제 몸을 이웃과 나누라던 호박이니 벌레와도 사이좋게 나눠먹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갑자기 호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마당에서 자랐으니 네 것이라고 인색하기 굴지 말라고 한다. 너에게 그리 이롭지 않은 놈이라도 얼굴 붉히지 말고 몇 통 넘겨주라고 한다. 이것이 자기가 땡볕과 찬비와 외로운 밤을 견디며 부지런히 몸을 불리고 늙은 이유란다.
호박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여기저기 자리 잡은 호박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핀다. 색이 약간 흐리거나,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면 새끼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표지慓識다. 그런 호박은 그들에게 얌전하게 넘겨줄 작정이다. 속이 쓰리지만 호박의 숭고한 정신을 나름대로 실천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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