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높은 산길에 올랐습니다. 857번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길이었지요. 안녕! 나는 길의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초면례를 합니다. 길은 금세 내 인사에 대꾸를 해옵니다. 토끼풀꽃들이지천으로 피어 있고 산괴불주머니와 씀바귀 꽃, 현호색들이 어지럽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싸리나무 꽃들이 옅은 보라색의 구름들을 산기슭에 드리우고 있군요. 꽃향기들이 고즈넉한 시간들 사이로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길 위에 핀 꽃들을 길의 신이 내게 건네주는 꽃다발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꽃다발을 넙죽 받아든 나는 한없이 행복해져서 죽은 다음 세상에는 길귀신이나 되어 쓸쓸한 날 길의 신의 말동무나 되리라 생각했지요. 길의 신이라 해서 왜 쓸쓸한 시간들이 없겠는지요? 지상 위에 삶의 숨결들을 부려놓고 살아가는 뭇 생령들의 꿈, 사랑, 욕망, 좌절, 병, 고통, 죽음... 신의 위치에서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들이 마냥 행복할 수만 있겠는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엔 나처럼 느릿느릿 산길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그의 옷자락에 선뜻 매달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봐, 이 수수꽃다리 꽃내음을 맡아봐.
저기 저 산딸나무 꽃빛깔은 어때? 저런 한 사흘쯤 굶은 얼굴이군... 핏기라곤 없어. 괜찮은 일이지, 이승에 머물 때 나도 경험해 본적이 있어. 한 일주일쯤 물만 마시며 견뎌봐. 그럴 때 영혼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시간이 찾아오지. 죽도록 갈망했던 시간들이 은빛 날개를 달고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일거야. 죽도록 미워했던 시간들이 천천히 네게 걸어와 네 볼에 자신의 살을 부비기도 할 거야. 시, 사랑, 언어, 철학, 부, 이름들... 한때 모두에게 소중한 것들이지. 그냥 한때... 한철...
나는 산의 맨 끝까지 올라갑니다. 그곳에 바람이 살고 있습니다. 꽃과 꽃 사이를 나무와 나무 사이를 그리움과 그리운 생각 사이를 바람은 아무런 허물 없이 불어갑니다. 숲속에서는 이상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불안해... 새소리 속에도 누군가 집을 짓고 사는 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어릴 적엔 산의 맨 끝에 오르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지요. 시도 때도 없이 굶주렸으므로 그때의 어린 내 영혼은 종이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습니다. 종이비행기는 어린 내 영혼을 싣고 계곡 사이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날았습니다.
꽃과 꽃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그곳엔 시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람처럼 그들도 아무런 형체가 없습니다. 바람이 툭툭 꽃향기를 건드리고 산딸나무 꽃 핀 가지에 몇 올의 싱싱한 숨소리를 올려놓을 때에도 시간들은 고즈넉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물 무렵 신비한 새소리들이 산 아랫마을로 내려갈 때에도 마을의 불빛들이 어둠 속에 힘겹게 반짝거릴 때에도 시간들은 그냥 시간일 뿐입니다. 존재의 흔적이 없이 머무르는 그리움. 종이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나는 또 하나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립니다. 산뻐꾸기의 울음소리 뒤에 남겨 두고 그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흘러갑니다. 또 하나의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다시 또 하나의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들이 꽃가루처럼 날아오르고 해가 지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고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이 마을에서 들려오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하늘 깊은 곳에서 빛나고 나는 내가 날린 종이비행기들 중 어느 하나는 그 별들의 언덕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지요.
내가 날린 비행기들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사는 마을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침이 오고 그때 어린 나는 참으로 행복한 마음이 되어 다시 산의 맨 꽃대기를 향해 올랐지요. 나는 가방에서 시집 하나를 꺼냅니다. 그러고는 첫 페이지를 찢어 종이비행길 접습니다. 숲속에서 신비한 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내 종이비행기는 그날들처럼 계곡 사이를 흘러갑니다. 나는 두 번째 장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접습니다. 보라색의 꽃들만이 아름답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내게 있었습니다. 나는 세 번째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립니다. 따스한 온기, 부드러운 감촉, 빛나는 창을 지닌 존재들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강요했던 시간들이 내게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종이비행기가 바람 속으로 떠오릅니다. 두 그루의 소나무를 넘지 못하고 비행기는 지상으로 떨어집니다. 꿈도 덩어리가 진다면 욕망에 못지않은 무게를 지닌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닫는지요.
어두워집니다. 하루 동안 위를 비었습니다. 아니 이틀인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가방을 열고 그 속에 머문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꺼냅니다. 봉지 속에는 두 개의 삶은 감자가 들어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감자의 껍질을 벗깁니다. 그리고는 먼 마을의 불빛들을 소금 삼아 한 입, 힘껏 감자의 살을 깨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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