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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他人의 거울 /김채영

에세이향기 2024. 6. 19. 10:03

他人의 거울 /김채영

 

 

 

 

  아버지는 내게 어떤 의미인가. 가끔 혼자 생각에 잠겨본다. 내 나이 아홉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 분은 언제나 내 생각 밖에서 마른 미역처럼 무심하게 건조되었다가 일단 내 안에 들어오면 거침없이 풀어지는 슬픔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는 아버지를 기억할만한 사진조차 없다. 오빠들에게 아버지의 독사진이나 추억의 가족사진이 누렇게 빛 바랜 보채 몇 장씩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아버지의 사진을 한 장쯤은 갖고 싶었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소중한 것들은 오빠들이 간직하는 게 훗날을 위해 나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도 친정에 가면 사진에 대한 미련인지, 해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잠시 아버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비록 시골 땅이었지만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적잖은 재산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가장의 일을 맡아 살림을 꾸렸지만 큰돈이 필요할 때는 항상 아버지가 남긴 땅을 조금씩 팔아 유용하게 쓰곤 했다.

작은오빠의 입학금, 큰오빠의 사업자금, 어머니의 입원비, 혹은 집을 늘리는 목적으로 아버지의 땅이 조금씩 팔려 나갔다. 그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저러다가 땅이 모두 팔리면 아버지를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

     다행이 지금도 시골에는 얼마간의 전답이 남아있다. 시골에 종종 다녀오는 친정식구들에게서 왠지 활기가 느껴진다. 그들은 오랜 날 변함없이 논밭을 둘러보며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날만 저물면 오빠들과 골목 어귀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어두운 전봇대 뒤에서 구두 발 소리를 내며 아버지가 나타나실 때는 골목길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빈손으로 귀가하시는 일은 드물었다. 약주를 무척 즐기시던 아버지였다. 늦은 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잠이 들면, 아버지는 몇 차의 술자리를 거치며 봉지가 터지고 찌그러진 과일을 가슴에 안고 돌아와 우리들을 차례대로 부르시곤 했다.

    아버지의 섬세한 면은 어린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집을 옮기더라도 전망이 우선이었고, 뜰에 유실수를 심더라도 복숭아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등 다양하게 심으셨다. 주말이면 가족동반으로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구를 방문하는 게 아버지의 즐거움이었다. 열두 살 연하의 어머니에게 늦장가 갔기에 가족 사랑이 남달랐던 나의 아버지. 그러한 좋은 기억만 남기고 불치의 병을 앓던 아버지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로 하여 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가슴에 둔 채 사춘기를 보내면서 두 오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다. 자상한 큰오빠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어느 때는 말수가 적지만 속 깊은 작은오빠가 아버지 쪽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다.

“에구, 계집아이가 이렇게 잠이 많아서 어떻게 시집가서 살겠니?”

    오빠들이 머리맡에서 어른스럽게 성화를 할 수록 더욱 곤하게 잠든척했다. 그 순간 나는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대리인의 단편적인 모습을 통해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었다. 훗날 내 남편도 꼭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오랜 날 품어왔던 기대와 달리 정작 내 손으로 선택한 남편은 아버지와 이미지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여러 형제들 틈에서 자란 그는 그 나름대로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대신해 줄 포근한 아내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내게 아버지 같은 남편이 되지 못하듯, 나 또한 그에게 어머니 같은 아내가 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나도 ,남편도 누구의 대신이 돼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친구 같은 사이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직도 남편에게 포기하지 못하는 작은 소망 한 가지. 가끔이라도 식구들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사들고 귀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남편은 늘 빈손으로 들어왔고, 아이들도 익숙해져 투정부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아마, 남편은 가게도 없는 시골에서 자라서 습관이 된 것 일거야. 좋은 쪽으로 생각해도 서운한 감정을 버릴 수 없었다.

    오늘 저녁 설거지를 하던 중 이상한 장면이 클로즈업 돼온다. T.V를 보다말고 남편과 딸애가 정답게 밀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가 엉뚱하게 드라이기를 찾아들고 나오더니, 숙달된 솜씨로 딸애의 머리를 매만져주는 게 아닌가. 딸애는 마알갛고 작은 손거울로 제 얼굴을 비춰보며 만족하다는 듯 방긋 웃고 있다. 그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야릇한 이 느낌을 무엇이라 표현해야할지.

   아침에 딸애가 머리 모양이 이상하다고 투덜거렸다. 그 때 나는 딸애에게 제 마음대로 커트를 했다고 핀잔을 주지 않았었나. 어느새 딸애는 귓속말 몇 마디로 무뚝뚝한 남편을 저렇듯 유연하게 녹였다는 말인가.

     남편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입버릇처럼 남자가 조잡스럽게 뭘 사들고 다니냐더니, 딸애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은 과연 체통 있는 일인가 말이다.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부녀가 오랜만에 의기투합했는데 간식을 내다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TV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내 마음은 소외감을 가장한 일종의 은밀한 질투였으리라.

   사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친한 사이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딸애에게 심하게 꾸짖던 날, 남편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며 복도를 찾아다니다, 딸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남편은 작은 침대에서 딸애를 꼭 보듬고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남편은 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살짝 딸애 방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 날의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실체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뒷날, 딸애는 오늘의 아빠를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을 것이다.

   내 유년 속에 인화된 아버지가 있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편과 딸애의 모습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왜 알지 못했을까. 아버지, 그는 여자 애들에게 최초로 이성을 비춰보는 감성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것을 느끼기에 그 때 내가 너무 어렸을 뿐.

   아직도 나는 타인(他人)의 거울로 아버지를 끊임없이 그려본다. 거리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남 몰래 훔쳐보곤 하는 것이다. 풋풋한 건강미를 발산하는 젊은 남성의 향취보다, 은빛 머리칼을 날리는 노신사의 푸근한 체취가 매혹적이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 것은 봄날같이 짧은 유년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홀연히 지워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