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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에세이향기 2024. 6. 20. 03:27
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배꽃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배 밭에 촘촘하게 백합이 피어났다. 배꽃이 만개할 무렵에는 그저 풀보기에 불과했을 여린 잎들이 눈부시게 끝도 없이 피어 하얀 나팔을 분다. 이른 봄날부터 한바탕 휘몰이 장단에 꿈같은 향연을 펼쳤던 배꽃이 낙화로 뒹구는 산간 밭은 온통 백합의 차지가 되어 이국적 정취로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날 배 밭을 지나면서 백합 몇 뿌리를 신문지에 조심스럽게 싸들고 온 뒤 베란다 화분에 옮겨 심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백합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 듯 날마다 두 세 송이씩 청신한 꽃을 피워냈다. 나는 그 때 베란다를 환하게 밝히는 순결무구한 백합을 보면서 다음날 피어날 꽃봉오리들의 숫자를 앞서 헤아려보곤 했던 것이다. 백합은 넓지도 않은 베란다 화분에서 쑥쑥 자랐고 무성하게 가지를 쳤다. 몇 번이나 큰 화분에 옮겨 심었음에도 그 힘찬 식물의 야성은 천장을 뚫을 듯이 멈추지 않고 키와 품을 늘렸다. 집안 구석구석이 백합의 향기로 그윽해졌다.

  한쪽에 다소곳하게 있다가 제철만 되면 존재감을 나타내는 겸손한 화초들과는 달리 백합은 차라리 도도하고 오연하게 빛났다. 베란다의 유리창 너머로 온종일 들어오는 햇살조차 감질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 웃자라 있었다. 간혹 고고한 자태로 나를 쏘아보면서 ‘네가 감히 비좁은 베란다에 나를 가두려고 ?’ 하면서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햇살 쪽으로 몸을 돌린 백합은 무수하게 피어난 꽃송이들의 무게로 쓰러질듯 힘겨워 보였다.

  받침대를 세우고 노끈으로 백합의 가지를 넘어가지 않도록 묶어주었지만 그 형상은 왠지 슬프고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풍요로운 들녘이나 농가에서 피어날 야생화를 한낱 나의 욕심으로 집안에 옮겨 심은 것은 잘못된 일인 것 같았다. 엄연하게 자연의 일부였던 야생화에게 내가 내어주는 공간에서 나만 바라보라고 길들인다는 것은 무리인 듯도 싶었다. 창백하도록 하얀 낯빛의 백합은 창 너머로 아련한 산마을에 시선을 둔 채 하염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백합은 친친 감긴 노끈을 풀고 푸른 치마 펄럭이면서 배 밭이 있는 고향마을로 달려가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지인에게 백합 얘기를 해주었는데 관심을 보였다.

 “ 우리 집은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셔서 마당이며 집안에 온통 꽃인데 가만히 보니 백합은 없군 그래. 그렇게 야생화를 생고생 시키지 말고 내게 주게나. 우리 집 화단에 옮겨 심으면 생기 있게 잘 자라날 거야. 백합은 내가 가져가서 잘 키우고 대신 우리 집 마당에 지천인 튤립을 몇 뿌리 가져 다 줌세 ”

 나는 그날로 그의 승용차에 백합이 담긴 화분을 실어 보냈다. 그 후 그 친구는 백합이 시골집에서 아주 평온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왔다.  ‘이제는 백합이 제자리를 잡았구나’ 내심 기쁘면서도 나는 그 친구에게 은근하게 서운한 게 있었다.  집안에 색색으로 피어나서 마당이나 대문 앞까지 차고 넘친다는 그 튤립, 튤립을 몇 뿌리 주겠다던 그 약속은 잊었는가. 백합 얘기를 하면서 튤립 얘기는 왜 안 꺼내는 가.

  어느 날 그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나는 묵은 빚을 받으러 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그의 앞에 앉았다.

 “ 우리 백합 잘 있는가?”

“ 어휴, 말도마라. 그 백합이 이젠 마당에 뿌리를 잘 내리고 얼마나 많이 컸나 몰라. 요즘 백합이 활짝 펴서 한창 보기가 좋은데 한번 와서 보고 갈래?”
  그 대목에서 그가 빠뜨린 게 있었다. 참, 내가 그때 튤립 몇 뿌리 준다고 하고 아직까지 잊고 있었네!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무심하게 국밥만 꾸역꾸역 입안에 퍼 넣고 있었다. 이런 눈치 없는 친구 같으니라고. 자신이 했던 말은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았다. 

 “ 우리 백합이 임자를 잘 만나서 호강을 하네. 그런데 백합 가져갈 때 준다던 튤립 몇 뿌리는 왜 안주는데?”

 내가 따져 묻자 친구는 당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아, 그게 말이야.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꽃이라서 누구에게 선뜻 내준다는 것이 마음에 안내키더라고. ”

 “이봐. 튤립이 마당에 한 가득 넘치고 남아서 대문 앞까지 밟히도록 피었다면서 그 거 몇 뿌리 덜어낸다고 무슨 큰 불효가 되냐?”

“ 집안에 가득한 꽃이지만 한포기한포기 모두 어머니와 추억이 깃들어서 차마 뽑아오지는 못했어. 미안해”

 나는 묵은 빚을 받으려고 선뜻 국밥 값을 낸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약속을 잊었다고 했다면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 터 순전히 의도적인 변심이었다. 하찮은 약속이라고 어머니 핑계를 대면서 뭉개버리는 쪼잔한 친구 같으니라고... 작은 일에 은근하게 뒤끝이 있는 나는 가끔 그 친구와의 찜찜한 거래를 생각하면서 섭섭해지곤 했다. 그리고 꽃 이야기는 나또한 잊은 채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꽃 욕심이 많아 온갖 꽃을 끔찍하도록 품에 끼고 사는 친구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봄날이면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룬 집에서 살고 있을 그를 만난 지도 이제는 아득하다. 그간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몇 번의 이사를 했다. 가지고 있던 그 많은 화분도 주천거리여서 얼어죽이거나 남에게 주었다. 그 친구에게 튤립을 몇 뿌리 받았더라면 그 또한 내게 짐이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사노라면 때때로 규격화된 원칙을 피해 뒷짐을 지고 두루뭉술 흘러 보내는 일도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듯도 싶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나는 친구가 사는 마을 쪽으로 안부를 묻곤 한다. 우리의 백합,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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