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줄 / 박수봉

에세이향기 2025. 2. 22. 09:14
 

줄 / 박수봉 

 

역전광장 급식 줄이 꿈틀거린다

머리 위엔 찢어진 그늘막이 펄럭거리고

길이는 허기처럼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김이 오르는 국물에 코를 박고

후룩 후루룩, 눈물 맛이 난다

어느 길을 밟고 왔는지 기울기야 다르겠지만

결국, 여기로 와서 줄을 이룬 사람들

한 그릇의 순서를 빼앗기지 않으려

불꽃 튀는 침묵이 헐렁한 간격을 메우는 동안

말쑥한 수트와 은백색 투피스가

서울 공항 비행기에 서서 손을 흔든다

반짝, 핸드백의 로고가 빛을 발한다

저 높이에서는 지상의 줄이 무엇으로 보일까

끓임 없이 혀를 날름거리며

먹이를 찾아 바닥을 기고 있는 구불텅한 뱀의 형상

여간한 멸시쯤엔 귀를 세우지도 않는 따위들은

깡그리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

비장한 표정 말잔치만 쏟아놓고 그들이 날아간 뒤

구름 띠처럼 남아있는 줄

기내식은 어떨까, 가래침을 내뱉으며

눈곱이 낀 늙은이가 맨 뒷줄을 잇는다

오마카세 문을 열며 줄을 힐끗거리는 이들은

이제, 꼬박꼬박 밥을 주어야 돌아가던 시계가

사라져버린 것을 안다

꼬르륵거리는 줄 위로 오늘의 예산이 바닥났다는

뉴스 한 토막이

꽈리를 튼 허기의 결속을 무너뜨린다

뿔뿔이 어둠 속에서 풀어지는 어둠들이 짙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동越冬/ 박일만  (0) 2025.02.23
고래 / 조옥엽  (0) 2025.02.22
호두 / 배두순  (0) 2025.02.21
시래기 / 도종환  (0) 2025.02.09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절규/박계옥  (2)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