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백반
나는 한때 밥집 여자이고 싶었다
순무를 곱게 절여 벌겋게 생채무칠 줄 아는
밥집 여자의 억척스런 순정을 흠모했음일까
그대의 붉은 목젖 닮은 서해 염전 갓구운 간소금을
노오란 속배기에 철철철 흩뿌리며
내 갈기든 삶 조용히 절이고 싶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돈도 국경도 바닥나 좌초된 난민이었을 때
떨어진 배낭 하나 끌어안고 도나우 강변 성벽에 앉아
내가 바라본 것은 밥내 자욱한 어떤 쓸쓸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숙생의 연기 자욱한 밥 한그릇 올려놓고
세상의 허기든 者(자)들 모여앉아
조용히 들어올리는 수저질이 아니라면
젯상에 올려지는 밥 한그릇은 무엇을 위로한단 말인가
차림표 위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걸어두고
쌀통 가득 공양미 삼백석을 풀어헤친 청진동 그 집에 앉아
그대 향한 인당수를 퍼올리던 가정식 백반
아슴히 귀밑머리 쓸어올리며
물오른 두릅나물에 신초장를 곁들이는
정붙이 하나 없는 밥집 여자의 늙은 가슴이고 싶었다
나 지금도 밥집 그 여자이고 싶다
- 이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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