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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가정식 백반/이선이

에세이향기 2025. 5. 21. 12:31


 

가정식 백반 

 





   

나는 한때 밥집 여자이고 싶었다   

순무를 곱게 절여 벌겋게 생채무칠 줄 아는   

밥집 여자의 억척스런 순정을 흠모했음일까
   

그대의 붉은 목젖 닮은 서해 염전  갓구운 간소금을

노오란 속배기에 철철철 흩뿌리며   

내 갈기든 삶 조용히 절이고 싶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돈도 국경도 바닥나 좌초된 난민이었을 때   

떨어진 배낭 하나 끌어안고 도나우 강변 성벽에 앉아   

내가 바라본 것은 밥내 자욱한 어떤 쓸쓸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숙생의 연기 자욱한 밥 한그릇 올려놓고   

세상의 허기든 者(자)들 모여앉아   

조용히 들어올리는 수저질이 아니라면   

젯상에 올려지는 밥 한그릇은 무엇을 위로한단 말인가
   

차림표 위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걸어두고   

쌀통 가득 공양미 삼백석을 풀어헤친 청진동 그 집에 앉아   

그대 향한 인당수를 퍼올리던 가정식 백반

   

아슴히 귀밑머리 쓸어올리며   

물오른 두릅나물에 신초장를 곁들이는   

정붙이 하나 없는 밥집 여자의 늙은 가슴이고 싶었다   

나 지금도 밥집 그 여자이고 싶다​

   

- 이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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