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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그거 안 먹으면/정양

에세이향기 2025. 5. 15. 10:39

그거 안 먹으면

정양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시와 정신》, 2016년 겨울호, 시와정신사. ​


□ 정끝별 시인 감상

아, 나이를 먹지 않으면 죽는 거였다! 약도 그렇고, "그거 안 먹으면" 죽는 거, 또 뭐가 있지?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고, 꿈도 무럭무럭 먹어야 하고, 마음도 매일매일 다잡아먹어야 하고, 때로는 화장도 겁도 물도 좀 먹어야 한다. 그게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거 많이 먹으면' 진짜로 죽는 것들도 있다. 뇌물이나 검은돈이 그렇고, 연탄가스가 그렇고, 벌점이나 경고나 욕이나 주먹이 그렇다. 그거 먹지 않고 사는 거, 그게 또 나이 먹는 기술일 것이다. 꼬박꼬박과 깜박, 더러와 벌컥, 제발과 좀, 하릴없이와 마지못해의 대비적인 부사들이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 '설날'이다. 설은 쇠는 건 나이를 먹는 일이다. 목구멍에 떡국 넘기듯 그렇게 쑥, 그렇게 미끈, 그렇게 쫀득하게 한 살 더 먹으라고 설날이면 굳이 떡국을 먹나 보다. '설날 떡국 먹듯', 기꺼이 약도 밥도 마음도 먹고먹고, 한 살도 더 먹어야겠다.

※출처: 조선일보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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