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안 먹으면
정양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시와 정신》, 2016년 겨울호, 시와정신사.
□ 정끝별 시인 감상
아, 나이를 먹지 않으면 죽는 거였다! 약도 그렇고, "그거 안 먹으면" 죽는 거, 또 뭐가 있지?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고, 꿈도 무럭무럭 먹어야 하고, 마음도 매일매일 다잡아먹어야 하고, 때로는 화장도 겁도 물도 좀 먹어야 한다. 그게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거 많이 먹으면' 진짜로 죽는 것들도 있다. 뇌물이나 검은돈이 그렇고, 연탄가스가 그렇고, 벌점이나 경고나 욕이나 주먹이 그렇다. 그거 먹지 않고 사는 거, 그게 또 나이 먹는 기술일 것이다. 꼬박꼬박과 깜박, 더러와 벌컥, 제발과 좀, 하릴없이와 마지못해의 대비적인 부사들이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 '설날'이다. 설은 쇠는 건 나이를 먹는 일이다. 목구멍에 떡국 넘기듯 그렇게 쑥, 그렇게 미끈, 그렇게 쫀득하게 한 살 더 먹으라고 설날이면 굳이 떡국을 먹나 보다. '설날 떡국 먹듯', 기꺼이 약도 밥도 마음도 먹고먹고, 한 살도 더 먹어야겠다.
※출처: 조선일보 2017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