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어 / 손세실리아
살얼음 낀 불갑사 계곡에서
제자리를 홀로 유유히 맴도는
물고기를 만났다
연약하고 투명한 체구임에도
진저리 치는 법 없이
도토리 단풍잎 가라앉혀놓고
침묵 속 고행 중이다
사는 일이
알몸뚱이로 얼음장을 뒹구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겹겹 중무장하고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삶의 오한에
괴로워한 지난날이 무안해져
자릴 뜨지 못하는 나를 응시하다
홀연히 자취 감추는
은수자(隱修者)* 같은
* 숨어서 도를 닦는 사람
- 손세실리아,『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 2014)
빙어 / 이재무
속 환히 들킨 채 사는 물고기. 몸피 작아 적게 먹으니 크게 감출 것도 꿍꿍이도 없는 투명 찬란한 물고기. 얼음 천장 아래 유유상종 동족 더불어 가만, 가만히 들숨 날숨 쉬며 바깥 소란에 아랑곳없이 살아가는 키 작은 물고기.
해마다 겨울이 오면 도시에서 몰려온 천렵꾼들 주전부리로 떼죽음당하는 눈먼 물고기.
- 이재무,『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
빙어 / 고진하
그 어느 날 강가에서
속없는 은빛 날고기를 먹었었지.
속이 환한 널 처음 보며 얼마나 눈부셔했던가.
나무젓가락으로 펄펄 살아 뛰는 너를 집어
초고추장에 휘휘 저어 먹으며 얼마나 찜찜해했던가.
먹고 먹히는 것이 산 것들의 숙명이라지만
감출 죄의식조차 없이 투명한 생(生)을
너무 사납게 씹고 또 씹었던 것은 아닌가.
먹을 것이 왜 하필 여리고 속없는 것이어야 했던가.
속없으니 뒤탈 없을 거란 생각을 했던가.
아작아작 투명한 것을 씹어
불투명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던가.
물의 길을 따라가다 재수 없게 걸려온 생(生)이
미로의 창자 속으로 들어가 무엇이 되었던가.
비계와 똥이 되었던가.
미로 속 미궁을 깨부수는
통쾌한 유머 같은 것이 되었던가.
속 다르고 겉 다르지 않은 투명인간이 되었던가.
혹 배탈 같은 뒤탈은 없었던가.
가을 하늘처럼
속없이 눈부셨던 널 떠올리면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자꾸 물어서 뭘 또 건지려 하겠는가.
- 고진하,『얼음수도원』(민음사, 2001)
빙어 / 이진수
빙어, 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그 물고기를 안다 직접 잡아 보기도 했고 그걸 안주로 소주잔을 비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누가 빙어라고 말하면 그게 살아 있는 물고기라기보다는 느닷없는 빙하기에 얼음이 되어 버린, 그러니까 그 맑은 내장까지가 얼음이 되어서 내가 죽을 때까지는 좀처럼 녹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물고기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처럼 나는 또 남자, 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여자 하나를 사랑한 적이 있다 얼마 후에는 그 여자 나를 떠나 멀리 흘러갔는데
지금도 누가 빙어, 라고 하면 내 몸에선 한밤내 얼음 어는 소리가 들리고 깊고 푸른 그 얼음 속에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 빙어가 산다
- 이진수,『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시와시학사, 2002)
빙어 / 주병율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발목이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김춘수,「뭉크의 두 폭의 그림」중에서
- 주병율,『빙어』(천년의시작, 2005)
빙어 해장 / 손택수
산적 같은 내 사촌의 배는 불룩한 어항이 되었다
만취한 그가 산 빙어를 대접째 훌훌
들어마셔버린 것이다 나는 감히
따라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멀거니 바라나 볼 뿐인데
물과 함께 목구멍을 미끄덩 통과한 빙어가
내장 속으로 파다닥 빨려 들어갈 때
살얼음 밀치는 물결 같은 것이 일렁이는지
진저리를 치며, 어이 배 속에 물고기가 노는 게 느껴지는구먼
이놈들이 장 청소를 하나 보네
사촌은 이게 이래 봬도 역사가 있는 해장법이라
임진란 때 억울하게 죽은 덕령 장군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거라 너스레를 떠는데,
동학군들 빨치산 노령병단들 숨어 찾아들던 추월산
불우한 사내들의 배 속 술독을 다스리기 위해
식도를 뚫고 위장까지 곧장 물길 트는 빙어
담양호를 통째로 다 마셔버리기라도 할 듯이
꿀꺽꿀꺽 두 눈 가득 얼얼한 물빛 담는다
- 손택수,『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빙어에게 / 오탁번
간이주점 때묻은 식탁
큰 유리대접 안에서 헤엄치는
빙어
오늘 아침까지도 의림지 깊은 물 속에서
산란의 꿈을 꾸던
빙어
한 마리에 3백원씩 주고
열 마리를 산 채로 먹다
젓가락으로 대가리를 꼭 집어서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다
빙어
미안해 잘가 안녕
의림지 깊은 추억 속에서
너는 신라 때부터의 내력으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몸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지만
지금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흐리다
꽃샘바람
더 춥게 불다
1년살이 꿈이
헤엄칠 때마다
빙어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땅거미 진 고개를 올라서며
내가 나를 죽인다
염치도 없는
대가리를
매운 고추장에 처박는다
빙어 사랑해
안녕
- 오탁번,『겨울강』(세계사, 1994)
빙어가 오를 때 / 손택수
빙어가 오를 때, 톡 쏘는 맛 채 가시잖은 바람을 뚫고, 시리도록 투명한 산란기의 빙어들이 한사코 강을 거슬러오를 때, 짱짱한 풀잎 하나 층층 눈을 뚫고 피어나듯, 저수지의 평온을 뒤로 한 채 꼬나보는 살얼음을 휘딱, 휘딱, 쓰라린 배때기로 뛰어넘는, 순리란 더러 순리를 온몸으로 거역하는 것인가 물 흐르는 대로 살 줄 알라는 높으신 말씀도 좋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날것으로, 온전한 날것으로, 정맥줄을 타고 심장까지 거꾸로 쳐올라와서 순환하는 핏물, 봄을 역류하는 결빙의 정신, 빙어가 오를 때, 산란기의 알집처럼 송아리 송아리 산수유 꽃멍울이 한껏 부풀어오를 때
- 손택수,『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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