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장롱의 말/이달균

에세이향기 2026. 5. 25. 10:55

장롱의 말/이달균

안방에 놓인 장롱은 고집으로 가득 차 있다

비녀를 빼지 않은 어머니의 팔십 평생

오늘도 오동나무는 안으로 결을 세운다

손이 귀한 집 손자는 언제 보냐고

벽오동 한 그루를 담장 아래 심었을

외가댁 어른들 한숨이 손끝을 저며온다

대동아 전쟁이란 흉흉한 소문 속에

감춰둔 놋그릇마저 기차에 실려가고

처녀는 장롱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일곱의 탯줄을 끊은 가위며 실꾸리며

눈치 보며 세 들어 산 좀들의 흠집들과

닦아도 추억이 되지 않는 삭아가는 소리들

딸들은 내다버리자고 무심코 말하지만

피난 간 식구들을, 아버지의 임종을

묵묵히 지키고 기다리며 예까지 왔노라고……

솜씨 있는 장인이 만든 오래된 악기의

만 가지 소리와 만 가지 사연들을

너희가 어찌 알겠냐고 안방에 앉아 일러준다

-이달균, 『장롱의 말』, 고요아침, 2005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도 구두를/이가은  (0) 2026.05.25
거룩한 도구/강정숙  (0) 2026.05.25
시인이 되려면 /천양희  (0) 2026.05.25
장작/정경화  (0) 2026.05.25
늙은 가스렌지/우정숙  (0)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