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귀선 평론 / 외딴방의 아리아 ㅡ 김정화 《새에게는 길이 없다》 · 《하얀 낙타》 · 《가자미》
1. 형식의 변주
김정화의 수필은 일률적이고 익숙한 형식을 경계한다. 기존 세계가 해석해 놓은 인식의 틀에 안주하기보다 이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데 이는 외딴방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소리의 낯섦과 같다. 마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윌든》에 등장하는 숲의 오두막 같은 외진 사유는 김정화만의 아리아를 있게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수필 몇몇은 선율이나 리듬에 변화를 주듯 형식의 변화를 꾀한다. 이때 수필의 원형이 흔들릴 수도 있겠으나 암시 또는 암유 등 언어적 기법으로 수필의 본질을 유지한다. 일테면 수필이 지닌 자율성이자 한계성을 나아감과 멈춤을 통해 안정을 꾀한다.
미국의 신비평가인 클리엔스 브룩스는 《잘 빚은 항아리》에서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언급한다. 그의 말처럼 형식과 내용은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종속하거나 구속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속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언어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관계인 것이다. 물론 과거 문학사에서 형식을 강조하는 예도 있었고 내용이 먼저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같은 논쟁은 차치하고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완성도가 미약하거나 무의미한 작품이 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둘의 관계를 대립과 갈등이 아닌 조화와 상생으로 보는 것이다.
김정화 수필의 형식적 특징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기표로서의 형식과 기의로서의 내용의 관계가 상생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때 숫자 三과 만나게 되는데 예로부터 숫자 삼은 대립과 갈등을 무화시키는 상생의 수로 해석했다.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 《참전제경》의 마음을 밝히고 세상을 밝힌다는 천 · 지 · 인 삼재의 조화와 상생은 세 경전의 요체이다. ‘三’을 우주만물을 나타내는 기본수로 본 사상이다. 또 三은 단군 숭배 사상을 기초로 하는 대종교의 삼위일체(환인, 환웅, 환검) 사상과 만물이 시작하는 수를 三이라 한 노자 《도덕경》과 불가의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불三佛 사상과 기독교의 성부 · 성자 · 성령도 三이라는 숫자에 내재된 자성의 원리가 담겨있다. 이외에도 샤머니즘에서는 금성, 해, 달의 세 신령三神靈을 의미하는 삼신三神을 신앙의 주신으로 삼는다. 이렇듯 장구한 세월 속에 숫자 三은 종교적 철학적 영향으로 우리 삶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스며있다. 가령 ‘삼세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등 속담의 형태 또한 그 밖의 언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시작을 의미하거나 하늘을 의미하는 1과 대립이나 갈등 또는 분열을 내포하는 부정적 인식의 수인 2를 3이 조화롭게 한다는 상징으로써 김정화의 의식에 투사된 자율성의 아리아이기도 하다.
이러한 三의 변주는 김정화의 문학의 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그 방식은 암시적 프롤로그를 적시하거나 시詩를 서막으로 인용하는 변주를 시도하는 가운데, 의미를 배면에 둔 三의 형식은 일률적 구성이 주는 시각적 단조로움을 상쇄하는 것은 물론 문학의 형식미까지 아우른다. 이 같은 형식의 자유로움은 등단 이후부터 최근 작품집에 이르기까지 두루 편재한다. 이에 三의 변주 형태를 띠는 김정화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아울러 희곡적 형식을 띠는 작품 역시 포괄적 의미에서 형식의 변주에 해당하므로 본고에 포함하기로 한다. 그의 수필집 1, 2, 3권과 선집 2권, 그리고 비평집 중에서 선집과 비평집은 제외하고 1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 2집 《하얀 낙타》, 3집 《가자미》가 이 평문의 대상이다.
2. 발효의 언표 방식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겉 뜻과 속뜻을 지니는 것처럼 숫자 三에는 언어기호로서의 기표와 상생의 기의적 의미가 있다. 젓갈이 소금과 섞여 삭힘의 과정을 거쳐 목적물(발효음식)로 거듭나는 것처럼 三의 형식에 조화의 의미가 내장되어 있다. 이때 三은 대립과 갈등의 이분법적 논리를 초월하는 발효의 언어라 하겠다. 이러한 해석의 바탕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전과 민간 신앙에서부터 근대 서구사상에 이르기까지 종교, 철학 등 인문적 영향이 놓여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의식 밑바탕에는 三이라는 숫자에 대한 긍정의 인식이 자리한다. 이 같은 인식이 김정화 수필의 형식적 특징에도 흐르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며 세 개의 챕터 또는 세 개의 이야기로 구분하는 형식에서 남다른 의미가 발효된다.
“어머니가 왜 좋았어요?”
한동안 먼 산만 올려보던 아버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냥 좋더라.”
ㅡ〈압언壓言 1-그냥 좋더라〉에서
아이는 몇 걸음 딛다가 뒤돌아보고 또 뒤를 돌아보고 반복하였다. 아버지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버지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준엄한 목소리 였다.
ㅡ〈압언壓言 2-계속 가거라〉에서
뼈째 삼키는 것, 그것은 갈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밥 그릇의 한 톨 밥알도 남기지 않는 세심, 두꺼운 고전을 끝까지 읽어 내는 끈기, 마라톤을 완주하는 집념, 무슨 일이든 온 힘을 다해 야무지게 하라는 말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뼈째 삼켜라.”
ㅡ〈압언壓言 3-뼈째 삼켜라〉에서
〈압언壓言 1∼3〉은 3집 《가자미》에 실린 작품으로 아버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세 가지 소주제로 구성하고 있다. 〈압언壓言 1 ㅡ그냥 좋더라〉는 가래떡처럼 길게 늘어선 방앗간 풍경 이야기와 “이삭 국수를 집어들던” 것을 언급한다. 더하여 “읍내 술도가에서 받아오던 양은주전자 속 막걸리의 텁텁한 냄새”와 “아랫목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던 소리, 약식 고두밥을 한 움큼 집어먹던 찐더운 서리 맛 정짓간 시렁 위에 차곡히 쌓여 있던 보시기들”은 그냥 좋았던 것들이었다며, 가난한 시절의 따뜻한 기억을 손잡아온다. 이어서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좋은 이유를 묻자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다가 “그냥 좋더라.”라고 대답한다. 여기에는 꾸밈이 없다. 무엇을 무엇이라 하지 않는 ‘그냥’의 기표에는 논리나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존재 그 자체로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첫 번째 압언으로 사랑이라는 추상을 보여주기 방식으로 구체화해 전언한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야말로 이유가 없을 때 가장 진실한 것이라는 것을 이면에 배치한 작품이다.
〈압언壓言 2 ㅡ 계속 가거라〉는 변변한 우산 하나 제대로 가질 수 없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준 요소비료 포대 비옷이 정서적 상관물로 등장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표 우의를 입고 비닐 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했”던 작가는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긴다. 아버지는 작가의 유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고 그것은 작가에게 압언壓言이 되었다. 딸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은 말 없는 말로 그 어떤 말보다 강한 내포를 지니며 부제인 “계속 가거라.”와 맞닿아 지금의, 김정화의 길이 된다.
〈압언壓言 3 ㅡ 뼈째 삼켜라〉는 갈치구이에 관한 이야기로 아버지의 잠언과도 같은 말씀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다. 작가가 말이 아닌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뼈째 삼켜라”라는 문장이 언표로서의 의미를 넘어 작가에겐 전 인생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기 때문이다. 노릇하게 구운 갈치구이가 입맛을 돋운다는 도입을 지나 갈치를 잘 먹지 못하던 어린 시절 기억 속 갈치를 소환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가난한 시절 갈치구이 냄새는 손님이 온다는 징조였고, 그날도 5촌 아재의 밥상에만 갈치구이가 오른다. 어린 김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고, 아재는 반을 뚝 잘라 작가의 밥그릇에 올려준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아버지는 아재가 돌아간 후 갈치 한 토막을 구워 잔뼈까지 꼭꼭 씹어 삼키라고 한다. “자디잘게 가루가 되도록 씹고 또 씹었지만, 매번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고인 침이었”기에 그땐 먹는 것을 포기했지만 세월이 흘러 뼈째 삼키는 일은 갈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반에 점철된 진리 같은 것임을 작가는 깨닫는다. 어찌 작가만의 성찰이랴. 이 같은 경험의 상징적 투사는 불특정 독자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압언壓言〉 시리즈는 아버지에 관한 회억을 뼈대로 3개로 나눈 형식과 거기에 담긴 내용이 견고하게 엮여 있다. 이 작품의 각 편에 붙인 부제들이 5음절로 통일된 것과 어미 ‘-더라’와 ‘-라’의 취사가 리듬을 형성함으로써 형식미를 아우르는 동시에 삼三의 기의적 의미를 추출할 수 있기에 깊이를 더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그대는 봄비처럼 깊게 울어본 적이 있는가. 시 한 구절로 마음 자락 젖어본 날이 있는가. 만가 같은 이별시에 참고 참은 심곡心谷이 터져버린 밤이 있는가.
이별 하나-통곡痛哭
삼십 년 전 겨울 동짓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뎃솥 가득 팥죽을 끓이라는 주문에서 예순 인생을 접는 마지막 눈빛을 읽었다.
이별 둘-통절痛切
그 후 몇 달 뒤에 다시 찾아온 이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중략) 그리운 자식들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갈 수밖에 없는 망자는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였지만, 어미를 보낼 수 없는 어린 자식들은 차마 똑바로 그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이별 셋-통증痛症
말 못하고 가슴 찢기는 아픔이 연의 끈을 놓쳐 버린 생이별이란 것을, 어디엔가 있을 “님의 침묵” 때문에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절망의 무게가 체념할 수 없는 마음을 짓누른다.
ㅡ〈‘님 따라기’ - 그러나 “님은 왔습니다.”〉에서
〈‘님’ 따라기〉 (1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는 - 그러나 “님은 왔습니다.”라는 부재와 함께 한용운의 〈님의 침묵〉 앞부분 3행을 프롤로그 형식으로 인용한다. “그대는 봄비처럼 깊게 울어본 적이 있는가.”라는 자조적 물음으로 본문을 연다. ‘그대’라는 인칭대명사는 작가 개인의 경험이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이된다. 1장 “이별 하나-통곡痛哭”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2장 “이별 둘-통절痛切”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애가 끊기고, 3장 “이별 셋-통증痛症”은 “연緣의 끈을 놓쳐버린 생이별”의 애고를 얘기한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며 이별도 ‘있음’의 현상이 된다. 보냈지만 보내지 아니한 자아의 내면은 역설의 논리로 “‘님’ 따라기”도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아닐지 물으며 통곡과 통절과 통증을 구조화한다. 이러한 형식에 곁붙인 제목 〈‘님’ 따라기〉에서 ‘님’은 작가 개인의 ‘님’에서 다수의 ‘님’으로 객관화된다. 《천부경》의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의 ‘三一’ 사상과 맞닿으며, 三이라는 숫자에 내재한 화기와 화합을 내장한다. 부모에 대한 회억을 통해 세계와 자아가 갈등하던 모습이 자기 자정을 통해 발효된 것이다.
〈끈〉 또한 세 개의 이야기를 끈의 의미와 연결한 작품이다. ‘이야기 하나’는 작고 수필가 허천과 오영재 화백의 이야기로 아침나절부터 저녁나절까지 함께 있으면서도 별말 없이 지내면서 서로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한 두 사람의 관계를 작가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관계로 상정하고 “마음의 끈으로” 묶어야 하는 우정의 끈에 대해 언급한다. ‘이야기 둘’에서는 이제 산문山門에 든 행자승과 노승의 선문답 같은 불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짐을 내려놓으라는 노승의 말을 행자승은 알아듣지 못한다. 작가는 이를 “세속의 끈, 마음의 짐”이기에 “버려야 할 끈”으로 해석한다. ‘이야기 셋’에서는 어느 부자가 아끼던 시계를 잃어버리고 찾을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불러 시계를 찾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아이들이 시계를 찾느라 야단법석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간 후 한 아이만 끝까지 남아 조용한 가운데 시계 초침 소리를 듣고 그 시계를 찾았다는 일화를 통해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세계를 강조하며 “가려야 할 삶의 끈”에 대해 언급한다. 이처럼 끈이 지닌 의미를 ‘우정의 끈’, ‘세속의 끈’, ‘선택의 끈’으로 구성한 세 개의 형식으로, 이때 三의 언표는 자아와 세계, 대상과 대상 사이의 화합을 이면에 둔다.
3. 내면의 좀생이별
무가에서는 새벽별(금성)과 해와 쪽달이 만나는 춘분과 추분에 좀생이혼이 내린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은 올림포스 전망대로 특별한 위도뿐이기에 고고학자들은 새벽별이 다니는 곳을 황금벨트golden belt라고 부른다. 빛(해)과 그림자(달)는 대립과 갈등과 모순을 지닌 상극관계이지만 민간신앙에서는 이들이 새벽별과 함께 셋이 한 자리에 모이는 춘분과 추분이면 화합의 기운을 발한다고 믿는다. 좀생이별은 이러한 민간신앙 차원의 의미를 지닌 새벽별의 시녀별로 육성六星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신앙 속 숫자 三을 토대로 화합과 상생의 의미가 들어있다. 우주 운행의 원리로 볼 때 김정화의 새벽별에 대한 지향은 비상이거나 마음에 새긴 ‘돌편지’일 것 같다. 그러한 의식이 내재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비飛〉는 ‘흔적 지우기’, ‘시선 너머’, ‘솟대가 된 새’라는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흔적 지우기’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음 목전에서 사람의 손에 구해진 낙동강 독수리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환경 파괴에 대한 질책과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새에게서 “낙오자의 삶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를 토로한다. ‘시선 너머’에서는 티베트 설산을 배경으로 검독수리 대형 맹금이 시체에 내려앉는 장면과 함께 티베트 민족 장례문화의 천장의식을 함께 해온 독수리의 생을 언급한다. 이때 “독수리의 입은 하늘로 이르는 문門”이라는 사유를 도출한다. 독수리가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거나 이어주는 존재라는 인식은 다시 ‘솟대가 된 새’의 챕터로 이동한다. 죽음 목전의 독수리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지난한 삶을 떠올리며 “신과 인간 사이에서 비상을 꿈”꾸는 솟대가 되어버린 새로 치환한다. 화자의 마음이 솟대를 흔들자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솟구치고” 그림자는 지평을 흔드는 것 같은 착시를 느낀다. 솟대 위의 새는 곧 자아의 내면으로 전이되어 비상을 꿈꾼다. 말하자면 현재(낙동강) 과거(티베트), 다시 현재(낙동강)로 이동하는 구도로 작가의 문학의 별은 좀생이별로 연결된다.
세상의 모든 물상은 편지다. 자연이 인간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 자연에게 띄우는 언어의 문양. 그래서 그들은 어떤 물건이든 흔적과 자국을 새긴다. (중략) 나는 때때로 편지를 읽고 싶을 때 불멸의 문양을 찾아 길을 나선다.
바위산을 돌아
세상에서 가장 큰 돌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이다. 틈틈이 선돌의 설화를 듣고 석벽의 모양새를 눈에 담았다가 마음조차 단단해지자 용기를 내었다. 지구의 중심에 있다는 호주의 에이즈락을 찾아 배낭을 멨다.
돌벽을 지나
역사의 병풍이다. 돌에 새겨진 회랑의 그림은 멸망한 크메르 왕국의 실록이자 대서사다. 사원 안 벽면 전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부조는 전쟁과 왕국의 역사를 전해준다. (중략) 어느 나라에서든 황제의 역사는 사라지고 도공의 예술은 남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묵언의 편지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신다.
바위 그림 앞에 서다
멀리 암각화가 물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반구대를 반월로 감싼 사연호에는 가을 산이 반쯤 내려앉아 있다. 수직의 절벽에 새겨진 고대 짐승들도 산그림자와 어우러져 물결에 출렁인다. (중략) 고대인들은 왜 바위그림을 그렸을까. 아마도 인간이 원하는 것을 바위에 새겨 신과 소통하고자 하였지 싶다.
나는 또 다시 돌편지를 찾고자 지도를 펼쳐든다.
ㅡ <돌편지>에서
<돌편지>는 서막의 형식으로 돌편지를 찾아 떠나고, 1장 ‘바위산을 돌아’, 2장 ‘돌벽을 지나’, 3장 ‘바위 그림 앞에 서다’ 그리고 끝은 돌편지를 찾고자 지도를 펼쳐드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기행수필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 자연에게 띄우는 언어의 문양”을 바위에 새긴 ‘돌편지’로 은유한다. 호주 에이즈락의 거대한 바위산에 새겨진 문양이 잊힌 전설을 호명하게 하는 1장과 석공의 숨결이 느껴지는 회랑부조에서 크메르인의 삶을 읽고 황제의 역사는 사라지지만 도공의 예술은 남는다며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묵언의 편지”에 감동하는 2장을 지나 3장은 반구대 암각화에 관한 것으로 바위 그림에 관한 편지다. 공간과 시간의 이동을 3장으로 나눈 내용이 <돌편지>로 합일된다. 베일 뒤에 가려진 신부의 얼굴이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처럼 가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돌편지>는 은유에 의한 지적 유희 또는 주지적 언술이 보이는 작품으로, “불멸의 문양을 찾아 길을 나선”다는 여행의 목적 배면에 작가의식이 암유된 작품이다. 돌에 새긴 글자들은 일차적으로 고대인들의 희원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불멸의 문양에 대한 작가의 희원이다. 여행지에서 혹은 회랑에서 혹은 바위 그림 앞에서 작가의 내면에 새긴 불멸의 언어는 좀생이별을 향한 작가의 지향으로 수렴된다.
<해풍海風과 문풍文風의 멋>(-‘고산’을 읽다)은 ‘1. 직신直臣의 삼성대’, ‘2. 황학대에 부는 옛 소리’, ‘3. 고산의 도道와 문文’으로 구성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고산’을 읽다, 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고산 윤선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 펼친다. 조선사회의 부패를 논쟁하거나 상소한 선비였기에 유배를 반복하는 고초를 겪은 고산의 기개와 절개를 칭송한다. 평론과 수필의 중간 형태로서 숫자 三에 대한 무의식이 반영된 작품으로 고산의 유배지를 지키던 동해 남부선의 간이역 ‘일광역’이 사라지고, “포구의 갈매기들만 고산의 시를 읊듯 끼룩거린다”는 진술에서 문인으로서 옛 문인을 예우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에스프리의 섬광>(-玄石 선생의 외로운 문학비) 역시 <해풍海風과 문풍文風의 멋>(‘고산’을 읽다)과 같은 구성으로 ‘1. 어둠과 고요’, ‘2. 먼지 같은 삶’, ‘3. 글과 사람’으로 나뉜 3장 형태를 띤다. 내용은 대신공원 편백숲 초입에 자리한 작고 수필가 김병규의 문학비를 찾아간 이야기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산계곡의 여느 암석이나 다를 바 없이” 잡목과 수풀에 가려져 허술하게 방치되어 있는 시비를 묘사하고 김병규 선생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이때 문장은 은유와 이미지를 곁들인 간결체가 글의 힘을 느끼게 하며 간혹 문장의 리듬을 가미하듯 만연체가 혼합되어 김정화만의 문체를 형성한다.
그 외에도 <영화 이야기, 하나-운명을 사랑하라, ‘토리노의 말’>, <영화 이야기, 둘-힘들 때는 울어라, ‘인사이드 아웃’>, <영화 이야기 셋-끝나지 않은 세월, ‘지슬’>은 그 접점이 무거움의 이미지로 통일된다. ‘토리노의 말’에서 작가는 운명에 거부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것은 영화 속 말馬에 대한 연민에서가 아니라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던지는 작가의 말이자 감독의 전언이기도하다. 두 번째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사춘기 소녀의 머릿속 공간이 배경인 영화에서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작가는 위안을 삼는다. “울면 눈물 대신 사탕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의 친구 분홍색 코끼리 빙봉”이라는 캐릭터가 영화 속 소녀에게 힘들 때 기대고 싶은 대상이듯 작가에게도 그러한 대상으로 동일시된다. 세 번째 영화는 제주 4 · 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이다. 작가는 영화가 이념을 시각화하기보다 학살의 참혹함을 알리고 역사의 상처를 통합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부제에서 말하고 있듯 역사는 “끝나지 않은 세월”이라는 것에 방점이 있다.
따라서 三은 김정화의 무의식의 흐름과 같은 기능을 하는 메타포로서 문학을 향한 내면의 좀생이별로 치환되는데, 三의 형식에 대입한 내용이 의미의 굴절을 통해 수필의 폭이 확장된다.
4. 포괄적 허용
작품 <여>는 희곡 형식을 차용한 예이다. 三이라는 숫자의 상징은 아니지만 형식의 변주를 시도한 예이다. 여기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정신이 배어있다. 집필과정에서 오는 매너리즘을 해소하기 위한 작가정신이 묻어나는 작품으로 수필에 희곡의 형식을 도입한 것은 문학 장르 간의 교섭이라 하겠다. 물론 전통적 수필 양식을 고수하는 측면에서는 허구와 사실의 구분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이 같은 장르 간의 교섭이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수필의 문학성과 미래지향적 차원을 강조하는 최근의 수필은 퓨전수필을 지향하는 추세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수필의 본향을 유지하는 가운데 시도하는 변주이거나 변형일 것이다. 본고 역시 三의 형식 외에 이 작품을 포함시킨 것은 형식의 변주 차원에서 포괄적 허용인 셈이다.
*프롤로그 - 서정주님의 <무등無等을 보며>를 읽으며 내 ‘바다의 무등’을 생각하다.
빈처貧妻 ; 어. 머. 니.
나보다 더 오랜 잠에서 잠시 깨어나 보셔요. 오늘처럼 잔월이 뒤늦게 핀 꽃을 비추는 밤이면 으레 그날이 생각나곤 합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아득한 옛일이지만 잊을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었지요. 그 사람의 전갈을 받고 담담하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으나 쉴 새 없이 요동쳐 내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진땀을 흘렸지요.
빈처의 母 ; (???)
(중략)
빈처貧妻 ; 어. 머. 니.
오늘, 당신이 한번도 본 적 없는 제 딸의 손을 빌려 그동안 묻어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으려 합니다. 지금은 백토가 되었을 당신에게 뒤늦은 사죄를 올리니 이제 아픔의 그늘 거두어 편히 잠드셔요.
*에필로그 – 물 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만 물 위에 나타나는 바위를 ‘여’라고 하듯, 나에게 ‘여’는 마음이 침잠할 때 드러나 나를 일으켜 주는 어린 시절 외딴집의 기억이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나의 ‘여’를 찾아 바다의 무등에 숨은 해안 비탈길을 걷는다.
ㅡ<여>에서
<여>는 부모의 이야기를 의미화한 작품으로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 잘 빚은 청자 같은 작품이다. 희곡의 형식을 취한 것은 작가(수필적 자아)의 어머니를 화자로 등장시켜 살아생전 못다 한 이야기를 화자의 어머니에게 들려주기 위함이다. 기실 작가의 어머니인 ‘빈처貧妻’가 화자로 등장해 ‘빈터의 母’(작가의 할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구조이지만 숨은 화자는 작가인 셈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기억 속에 투사된 부모의 운명적 만남과 작가의 외딴집에 대한 기억이 '여'를 매개로 구성된 이야기다. 소작농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그 주인집 지아비였던 아버지의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은 사랑을 달리 구조화할 수도 있었겠으나 김정화는 희곡의 형식을 차용해 고정화된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다. 화자를 어머니로 내세운 배면이 암묵적으로 흐르는 이 작품은 희곡의 구조이기에 수필의 토대가 흔들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결미에서 “오늘, 당신이 한번도 본 적 없는 제 딸의 손筆을 빌려 그동안 묻어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으려” 한다는 것으로 수필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수필의 공간적 배경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는 저승이 된다. 저승의 어머니가 이승에 있는 작가의 손을 빌린 구조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여러모로 수필이 지닌 포용력을 활용한 예라 하겠다. 이러한 내용을 물 속에 잠겨 있다 썰물 때만 나오는 바위 ‘여’의 특성을 살려 작가의 마음 속 바다의 무등으로 치환하여 서술한다. 프롤로그에서는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를 통해 ‘바다의 무등’을 생각하는 형식을 취하고 에필로그에서는 작가에게 삶의 비타민과 같은 어린 시절 외딴집의 기억을 언급함으로써 ‘여’를 통한 기억의 항해를 떠난 셈이다. 조모, 부모, 작가 3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3이라는 숫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5. 언어의 주물사鑄物事
김정화는 언어의 주물사鑄物事가 되어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잇대어 형상화한다. 고백의 문학으로서 수필은 과거를 회상하고 그 이면적 주제를 어떤 형식으로 언표할 것인가 고민하기 마련인데 김정화의 방식은 형식의 변주를 통한 의미화의 길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의미를 생성하는 하나의 지류로써 숫자 三의 변주를 통해 그가 해석한 문학의 길이기도 하다.
보편적으로 ‘三’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에서 복福의 의미로서 긍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三’은 동학의 천 · 지 · 인 사상과도 연결된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사람 사는 일이 천지의 매개로 작용하고 그 작용들은 여러 양태로 나타나는데, 김정화의 작품 속 三의 변주는 무의식에서 발현된 형식일 수도 있고 의식적인 장치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三의 변주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낯선 시도이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영혼과 형식》), 반성완, 심희섭 역, 심설당, 1988)에서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또 형식은 그것이 생겨나는 바의 삶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 표명”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김정화의 수필 형식은 작가가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라든가 삶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이때 발현되는 인식의 빛은 그 본질처럼 일시적 현상으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기존에 균열을 가하면서 내면의 별로 지속될 것이다. 부연하자면 김정화의 내면을 떠도는 문학의 좀생이별은 그의 외딴방에 거주하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형성하면서 쇠에서 물이 나고 물에서 나무가 나듯 상생의 자장 안에서 만상을 三의 상징에 대입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아리아는 인간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三의 형식에 이면화 되어 있는 또 하나의 암유이자 변주이다. 수필집 1, 2, 3권에 고르게 편재한 이 같은 형식의 다양성은 김정화의 기억 속 ‘외딴방’에서 부화된 아리아인 것이다. 그러니까 ‘외딴방’*은 그의 사유가 시작되는 곳으로 자신과의 관계 회복의 방이기도 하며 대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애별리고의 고통을 삭히는 방이기도 하다. 그 방에서 탄생한 언어의 음표들이 문학의 오선지에서 음역을 오르내리며 변주된다.
* ‘외딴방’의 관형사 ‘외딴’은 《수필미학》2020년 가을호 ‘작가 집중탐구’ 코너, 김정화 작가론 〈수필의 힘과 위로의 방식〉, ‘외딴집의 원형archetype’에서도 일정부분 언급했음을 밝힌다. 당시 청탁 원고 분량의 과다 때문에 ‘형식의 변주’ 부분을 남겨놓았다. 여기에 판화적 이미지를 더하여 《수필세계》에서 〈외딴방의 아리아〉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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