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위독의 형식
- 시집 , 『말달리자 아버지』2002년 김왕노,『천년의시작』刊
유성호(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교수)
1
김왕노의 신작시집 『말달리자 아버지』는, 그가 그동안 보여준 비극성의 언어가 다양한 비유적 상관물로 확산되면서 ‘시적인 것’의 깊이를 구축한 사례에 속한다. 그의 시편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을 꿈꾸는 상상적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언어들은,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상상적 거처를 만들어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지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 형식을 증언하는 곳으로 한결같이 귀환한다. 그의 시편들이 합리적 인과론을 일탈하면서도 ‘환상’이나 ‘탈주’를 근간으로 하는 최근 시적 동향과 현저하게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언어는, 외연 확장을 통해 뭇 사물로 권역을 넓혔다가, 다시 자기 확인이라는 불가능한 꿈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때 김왕노는 슬픔과 비극을 우리의 존재 형식으로 노래하면서도, 지상의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언어적 사제(司祭)가 된다. 결국 이번 시집에서 그는 소멸해가는 자의 고독함으로, 소멸 직전의 위독함으로, 소멸해가는 것들을 감싸안으면서 사물과 생의 형식을 탐색하고 증언하는 시편들을 보여준다.
2
시집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시편들은,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사물들의 존재 형식이 낡고, 어둑하고, 버려져 있고, 사라져가고, 심지어는 ‘위독’한 상태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 속에 들여앉히고 있는 사물들은 퇴락과 소멸의 순간에 놓여 있는 것들이 많다. 이처럼 ‘신생’의 감각보다는 현저하게 ‘소멸’의 감각을 택하고 있는 김왕노 시학은, 다음 시편에서 ‘어머니’라는 ‘쓸쓸한 기계’로 표상되고 있다.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어둠이 와도 작동되지 않는 어머니, 엔진이 올라붙은 어머니, 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한 어머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머니, 풀이 서걱거릴 때마다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대량 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던, 과부하가 걸렸던 어머니, 노을이 밀려들면 한창때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을 떠올리며, 어머니 저기 버려져 있다. 모터가 타버려 수리되지 않는 어머니, 한낮이 머물다간 자리가 벌건 녹으로 번진다는 어머니,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저기 혼자 버려져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버려져 있다.
― 「쓸쓸한 기계」 전문
시인은 풀밭에 버려져 있는 쓸모없는 낡은 기계를 ‘어머니’로 명명한다. 그 ‘쓸쓸한 기계’는 풀밭에 버려져 작동되지 않는다. 웃자란 풀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이 폐물(廢物)을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이때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겹쳐진다. 기억의 뿌리마저 흔들리는 그 어머니는 기계처럼 버려져 “노을이 밀려들면 한창때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과 어느새 등가가 된다. 모터가 망가지고 외관은 온통 녹이 슬어버린 이 ‘쓸쓸한 기계’는, 오랜 세월을 통과한 후 천천히 소멸되어갈 수밖에 없는 유한자로서의 존재 형식을 환기하면서, 그 소멸의 형식이 모든 존재자들의 편재적(遍在的) 원리임을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버려져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쓸쓸한 운명의 표정들은 시집 곳곳에 나타나는데, 예컨대 “저승에 가서도 내 축원을 위해”(「방생」) 사시면서 “내 굽을 말없이 갈아주시고/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내 눈물을 닦아주시”(「말달리자 아버지」)는 아버지나, 모든 속도의 관성이 “죽음에게로 기울어”(「파라다이스 폐차장」)가고 있는 폐차장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가혹한 운명은 이제 ‘위독(危篤)’이라는 상태로 전이되어 자신의 선명한 육체를 드러낸다.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울부짖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내기도 합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 새워 왔을 때 나는 날 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뼈마디까지 드러나게 한답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도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속의 어둠을 견디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한답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그대에게서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르다는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러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이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 「위독」 전문
‘거대한 짐승’처럼 위압적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위독’은, 우리에게 치명적이지만 불가피한 존재 근거가 된다. ‘철학’도 ‘청춘’도 그리고 ‘숨겼던 진실’에 대한 폭로도 ‘위독’의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위독한 자만이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할 수 있다. 그래서 생의 순간마다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스스로의 살점을 갉아먹어 생의 뼈마디”를 드러낼 수 있다. 그 ‘생의 뼈마디’를 통해 우리는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도 “관 속의 어둠”을 견디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대’라는 이인칭도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 있다. 그 순간 시인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궁극에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울음소리로 화답한다. 이 위독하기 그지없는 ‘나’와 ‘그대’의 상응(相應) 과정이야말로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관계론적 망(網)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자신과 가까웠던 이들의 연쇄적 스러짐을 두고 “누가 시도 때도 없이 도미노 놀이”(「붉은 연쇄반응」)를 하고 있는가 하면서 탁월한 비유를 보여준다거나 “불 들어갑니다. 제발 나오세요. 불 들어갑니다. 제발 나오세요.”(「다비식」)라고 노래하면서 소진의 과정을 통해서 존재의 역설적 갱신을 사유하는 대목에서 단연 빛난다.
이처럼 김왕노 시인은 존재자들의 ‘소멸’과 ‘위독’의 조건을 통해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우두커니,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우리의 불가항력적인 존재 형식을 탐색하고 증언한다.
3
김왕노 시인이 이전 시집인 『슬픔도 진화한다』(천년의시작, 2002)에서 집중적으로 보여준 이미지는 아마도 ‘죽음’ 혹은 ‘죽음’과 연관될 수 있는 비유적 계열체들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죽음’은 인간의 경험 가운데, 관계와 기억들을 단절하는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지점이자 모든 지각 가능한 관계 형식을 차단하는 비극적 사건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세계에 대한 부정의 사유로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죽음’이 가지는 풍부한 역설의 속성을 통해, 이 불가항력의 모멸들을 견디고 그것을 무겁게 성찰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울음이 키운 영안실 입구의 후박나무는 푸르다.
울음이 잎맥이 되고 잎자루도 되고
어떤 사람이나 결국은 가슴에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어
남겨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다.
죽음이란 얼마나 검은 윤기나는 비장의 무기인가.
죽음을 보는 순간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오래 울고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포커판을 벌려도
우리는 죽음 곁에 머물러주는 저 마음들이
얼마나 순결한가 안다.
울음이 키운 영안실 불빛은 대낮같이 환하다.
떠나면 한때 제 것이었던 생시의 풍경을 더 자세히 보고 떠나라며
남겨진 사람들이 여기 저기 켜둔 등불
간간이 영안실 밖으로 새어나간 불빛으로
영안실 입구의 후박나무는 더 푸르다.
불빛이 나이테도 되고 더 먼 지축 쪽으로 뿌리도 뻗게 하고
언제나 영안실 입구의 후박나무는 푸르다.
죽음이 딛고 갈 길인 양 그 그늘마저 촘촘하다.
― 「영안실이 있는 풍경」 전문
‘영안실’은 생자와 망자가 마지막으로 동거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영안실’은 죽음의 마지막 절차를 치르는 특수 공간이기도 하지만,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우리들 생의 형식을 고스란히 비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안실 안쪽의 울음소리들이 밖으로 새어나와 그 근처의 후박나무를 푸르게 키운다. 울음들이 쌓여 나무의 육체가 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누구나 “결국은 가슴에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어/남겨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다”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가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은 ‘죽음’과 ‘기억’이라는 형식으로 매개되고 결속된다. 그러니 ‘죽음’이야말로 “검은 윤기나는 비장의 무기”가 아닐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죽음 곁에 머물러주는 저 마음들이/얼마나 순결한가”를 절절하게 깨닫는다.
이제 울음소리들이 키운 영안실 불빛이 밝아지고, “간간이 영안실 밖으로 새어나간 불빛”으로 후박나무는 더더욱 푸르러지고, 나무들은 마치 “죽음이 딛고 갈 길인 양 그 그늘마저 촘촘하”게 서 있다. 이처럼 소멸 직전의 존재자들과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이 ‘영안실’이라는 죽음의 거소(居所) 속에서 공존하고 소통하는 장면은, ‘죽음’이 비극적 특수 상황이 아니라 생의 보편적 존재 조건임을 확연하게 알려준다.
생각해보니
저 언덕을 넘어 여름이 내게 오지 않았다
북방여치 울어야 할 늦여름의 시기인데
남루한 봄의 슬픔만 내게 죽치고 있다.
밤이 오고
한 초롱 내 목숨에 심지를 담가 등불을 켜야 하는데
불빛을 따라 어린 게 같은 아들딸이 귀가해야 하는데
지축이 흔들려 내게 백야가 왔나
아직도 내게 떠도는 행려병자 같은 봄 햇살
생각해보니
저 거리를 지나 어떤 그리움도 내게 오지 않았다
마흔도 훌쩍 넘었는데
벌써 심은 꽃이 시들어가는데
누가 거리에서 혁명을 외치다 쓰러져가며 부른 아픈 노래인가
몇 년간 노래만 내게 와 살고 있다
문도 며칠째 따두었는데 와야 할 것은 오지 않고
먼지만 쌓여가는데
내게 와 떠나지 않는 한 시대의 어지럼증
생각해보니
저 언덕을 넘어 어떤 종소리도 내게 울려오지 않았다
어떤 맑은 별도 내게 흘러오지 않았다
― 「결핍」 전문
이 작품은 우리의 생이 ‘죽음’과도 같은 근원적 결핍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물론, 그 ‘결핍’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케 하는 양도할 수 없는 조건임을 다시 한번 명징하게 알려준다.
여름은 오지 않고 늦여름이 되도록 “남루한 봄의 슬픔”만 남아 있는 것, 그래서 마치 “행려병자 같은 봄 햇살”을 여전히 맞아들여야 하는 존재의 아이러니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꽃은 시들고, 혁명에 대한 열망도 기억도 스러져가고, 노래만 부르다 먼지만 쌓여 가는데, 불혹을 넘긴 시인은 “내게 와 떠나지 않는 한 시대의 어지럼증” 속에서 “저 언덕을 넘어 어떤 종소리도 내게 울려오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불모의 상황에서 시인은 “어떤 맑은 별도 내게 흘러오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종소리도 별도 없는 ‘결핍’의 상황이 생래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배려해/누가 켜준 저 가물거리는 등불”(「푸른 국도」)을 바라보고 있는 김왕노 시인은, ‘죽음’과 ‘결핍’의 조건을 통해 존재자들의 심연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이렇듯 간단없이 존재의 ‘소멸’과 ‘위독’과 ‘죽음’과 ‘결핍’을 시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김왕노 시인은 불치의 비관론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의 결여 형식들이 불가피하게 ‘기억’이나 ‘흔적’으로 남게 됨을 증언함으로써, 여느 비관론과는 현저하게 다른 역동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때 그는 존재자들의 외관을 바로 투시하지 않고 일종의 ‘흔적’을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그가 탐사하는 ‘유적(遺蹟)’은 그래서 ‘유적(遺跡)’이 되기도 한다.
가랑잎 하나 물 위에 흐르는 오후, 거대했던 것은 다 유적으로 가는데
거리 몰래 지금 내 안에 우뚝 서 있는 너도
유성이 흐르고 비가 오고 이끼 돋아나면 나의 유적으로 남으리라
손톱 밑으로 자꾸 잔물결로 밀려드는
네 찾아가다 순교 당한 내 그리움의 기일도 멀지 않았는데
머지않아 노을 속에 우뚝 서 있을 미루나무 숲을, 머지않아 노을 속에 퍼지는 종소리를
몇 마리 양 떼처럼 몰아
내 안의 유적 곁으로 저물어가는 내 안의 유적으로 순례를 떠나가는 내 생을 보기도 하리라
어디나 창궐하는 시간의 애벌레 그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속이 비어가는 대궁들
삭아져 내리는 초록의 돔들
거리 몰래 내 안에 우뚝 세워둔 너는 눈부신 이파리를 피우다가
네 위로 푸르른 하늘 열리면
네 입술이며 눈썹이며 눈동자며 몸이며 네 뜨거운 자궁이며 손끝이며 어깨며
단단히 익어 불멸의 유적으로 남으리라
내가 먼지로 우우 피어오르는 날을 위해 너는 유적으로 우뚝 서기도 하리라
― 「유적을 위하여」 전문
“거대했던 것은 다 유적”으로 남는다. 그렇듯이 모든 타자들도 “나의 유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시인은 “노을 속에 퍼지는 종소리”를 몰아 “내 안의 유적”으로 저무는 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네 입술이며 눈썹이며 눈동자며 몸이며 네 뜨거운 자궁이며 손끝이며 어깨”도 “단단히 익어 불멸의 유적”으로 남게 될 것을 상상한다. 이처럼 ‘흔적’을 통한 불멸의 기억들은 “내가 먼지로 우우 피어오르는 날”에도 “유적으로 우뚝” 서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은 모든 것이 소멸한 후에도 이처럼 유적으로 남아 “피가 피에게로 흐르는 소리”(「유전」)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멸인 것처럼 살다 사라져간”(「불멸인 것처럼」) 존재자들의 분명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흔적(유적)’만이 불멸을 유추케 한다.
이처럼 “항생제가 듣지 않는 상처”(「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것이란 뜨거운 눈물뿐”(「후일」)이라고 말하는 김왕노 시인은, ‘흔적(유적)’을 통해 불멸을 상상하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그 ‘흔적’을 공유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우리는 모두 “쓸쓸한 인연”이 된다.
단전이 된 그는 그곳에 폐가로 남았다. 불 켜지지 않는 그에게 쥐며느리와 들고양이의 흔적이 낙인같이 찍히고 따지고 보면 그를 살다 간 가장이 제초제 마신 이야기며 그에게 흘러들던 총성이 콩알같이 박히던 세월의 변천사도 담장 밑의 붉은 앵두도 이제는 끊어진 쓸쓸한 인연이었다. 어제는 그의 발치에서 종일 뻐꾸기 울고 그의 뒤란에 우물물이 말라가자 왜 생의 끝은 목이 바싹 말라야 하는지 종국에 이르러 자리끼 한 사발 머리맡에 놓아주는 물기 젖은 손은 없는지 왜 단전 후 또 단수까지 겹치는지 그에게 등 돌리고 황급히 집을 빠져나간 수국꽃 환한 여름이며 수취인 부재로 되돌아가는 개울을 건너온 달빛이며 한때는 대문을 살며시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던 물안개며 경칩이 울음이며 뽀얀 발자국 소리며 이제는 멀리 떠나가 밤새 이무기로 울어대는 불구의 인연, 다시는 맺지 말아야 할 쓸쓸한 인연.
― 「쓸쓸한 인연」 전문
여기 ‘폐가’ 한 채가 서 있다. 이제는 쥐며느리며 들고양이 같은 야생동물들의 흔적만이 “낙인”처럼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는 이곳에서 살다간 “쓸쓸한 인연”들의 서사(narrative)가 풍부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물물도 말라버리고 단전에 단수까지 겹쳐 “수국꽃 환한 여름”이나 “개울을 건너온 달빛”이나 “한때는 대문을 살며시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던 물안개”나 “뽀얀 발자국 소리” 같은 것들이 모종의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시인은 이들을 “다시는 맺지 말아야 할 쓸쓸한 인연”이라 했지만, 그것은 인연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반어(反語)이기도 하다. 이처럼 ‘폐가(廢家)’라는 시간의 ‘흔적’은 우리들의 쓸쓸한 존재 형식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5
모든 사물은 소멸 직전의 순간성 속에서만 존재의 순수한 외관을 드러낸다. 그 점에서 사물의 ‘영원성(eternity)’이라는 것은 상상적 관념일 뿐이고, 시간성의 흐름 자체를 부정하는 시간 부정적(negative) 개념이다. 따라서 영원한 것은 없고 사라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모든 사물은 사라짐으로써만 자신의 운명이 부여받은 시간성을 충실히 견지하고 있다 할 것이다. 김왕노 시인은 그 존재자들의 순간성을 충실하게 그리고 미학적으로 부조(浮彫)해낸다.
물 그림을 그렸네. 그려놓고 보면 증발하는 도시를, 얼굴을, 그 투명한 날을 그렸네. 그려놓고 보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읽힐 듯 말 듯한 한 사람의 마음도 그렸네. 세상도 태양이 그리는 물 그림. 언젠가는 증발되어 갈 물 그림. 심심한 날 손가락 끝에 물 찍어 그림을 그렸네. 가질 수 없어 안타까웠던 것과 가져서 내게서 망가진 것들을 물을 빌어서 그렸네.
물은 지겨운 듯 금방 사라지고 눅눅함마저 남기는 게 아니란 듯 바짝 말라가도 손가락 끝에 물 찍어 물 그림을 그렸네. 그려도 날아갈 그림. 가질 수 없는 그림. 모두 떠나 쓸쓸한 날 그 흔한 물 찍어 물 그림을 그렸네.
― 「물 그림」 전문
그러한 상상적 부조는 이 작품에서 ‘물 그림’으로 표상된다. 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그려놓고 보면 증발”하고 만다. “언젠가는 증발되어갈 물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시(詩)’를 쓰고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된다. ‘흔적’으로만 남고 결국은 모두 증발해버릴 언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손가락 끝에 물 찍어 그림을” 그린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까웠던/것과 가져서 내게서 망가진 것들을” 노래한다. ‘물’은 금방 사라지고 바짝 말라갈 것이지만, 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인은 “모두 떠나 쓸쓸한 날”을 위하여 ‘흔적’으로 남아 있을 ‘시’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김왕노 시인의 이번 시집은 어느 시편을 인용해도 좋을 것 같은, 태작을 찾아보기 힘든 질적 균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 시집보다 훨씬 넓어진 음역(音域)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세세히 언급은 못했지만, 가령 ‘전쟁’이라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 신(神)을 거스른 폭력을 비판하면서, “30일 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공을 찼던 알리의 몸에서 두 팔이 하늘나라로 갔다. 어머니가 사막의 이슬을 받아 그에게 준비해주던 아침도 그를 무등 태워주던 아버지의 튼튼한 어깨도 하늘나라로 갔다. 할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사막의 신기루에 대한 이야기도 미사일 폭발과 함께 갔다.”(「알리 이스마엘 압바스의 잃어버린 팔」)라고 묘사하는 의식은 그의 ‘슬픔’이 가지는 사회성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마찬가지로 저수지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해오라기와 “야근 수당 몇 푼이 월급에 보태져도 여전히 쥐꼬리만 한 월급이 학원비로 급식비로 공과금으로 흩어져갈 때 비로소 가장이라는 슬픈 자리가 보전된다는 것”(「해오라기」)을 온몸으로 느끼는 익명의 K를 병치하는 데서 그의 사회적 자의식은 드러난다. 그것은 “이 도시 누구에게나 검은 풀이 돋는다. 검은 풀잎 위에 죽어가는 별빛, 검은 풀숲에 죽어서 버려진 검은 나체, 저 검은 광장, 저 검은 정부청사, 검은 청계천 어디나 이제 검은 풀씨가 날린다. 검은 풀이 돋아난다.”(「검은 무늬의 나날」) 같은 비판적 암유(暗喩)에서도 선명한 육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집에 나타난 김왕노 시편의 주조(主潮)는 “내 영혼의 순결”(「눈물」)에서 길어올리는 ‘고독’과 ‘위독’의 형식이다. 그의 언어는, 생의 형식에서 비롯되는 ‘고독’과 ‘위독’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파르게 얻어지는 정신적 깊이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왕노 시학은, 일견 어두워 보이고 쓸쓸해 보이는 언어를 넘어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존재의 심층을 따듯하고 감싸 안는 데서 완성되어갈 것이다. 자신의 몸을 투과하지 않은 어떤 언어도 발화하지 않는 김왕노 시인의 직접성을 생각하건대, 그가 ‘고독’과 ‘위독’의 형식으로 그려낸 일인칭의 고백 양식이, 오랜 시간 자신을 억눌러왔던 몸 내부로부터 솟아나와 “낮은 톤으로 그러나 울림만은 큰 시”(「내 시의 날줄과 씨줄」, 『제7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품집」, 예맥, 2006)로 확장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유성호(문학평론가)
1964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받음. 1999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저서로는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상징의 숲을 가로질러」와 편서로『대표시 대표평론」을 펴냄. 2001년도 대산창작기금과 제1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中.
[출처] 고독과 위독의 형식-유성호 평론가|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디카시의 진화/김왕노 (0) | 2026.06.17 |
|---|---|
| 광음을 휘젓는 촌철살인의 디카시학 『연잎의 기술』/김왕노 (1) | 2026.06.17 |
| 서정의 사려니숲 그리고 순수와 역린의 시ㅡ문설 시집 『어쿠스틱 기타』 2024, 시인광장 (1) | 2026.06.13 |
| 배귀선 평론 /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 - 김산옥 《수필미학》(제34호) (0) | 2026.06.07 |
| 다시 생각해 보는 수필 쓰기/강돈묵 (0) | 2026.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