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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의 등뼈/이정희

에세이향기 2021. 9. 21. 06:56

자루의 등뼈

 

이정희

 

커다란 입 하나 가진 자루는

바닥의 비애를 잘 안다

바닥의 바닥이 중심을 잃는다

 

등을 곧추세우는 것은

바닥을 헤어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자루는 먹어치운 만큼

고스란히 토해놓는다

그건, 그의 일

입 하나로 하루를 산다

 

등의 너머는 그의 것이 아니어서

힘껏 달려가면 늘 뒷걸음친다

한 뼘의 직립도 세우기 힘든데

억지로 세운 등뼈는 가끔 고꾸라진다

그때마다 하루는 쭈글거린다

 

무얼 담아도 묵묵한 자루

마음껏 먹어도 체하지 않는다

 

자루에서 뼛조각 서걱거린다

 

혼자 세울 수 없는 헐렁한 뼈들

여럿이 함께 기대면 쉽게 세워진다

하루치의 시간과 바람이 들어

팽팽하게 조여 올 때

질기고 억센 바닥을 딛고

가파른 등뼈를 세운다

  

​알고 보면 밤과 낮도

자루의 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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