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의 등뼈
이정희
커다란 입 하나 가진 자루는
바닥의 비애를 잘 안다
바닥의 바닥이 중심을 잃는다
등을 곧추세우는 것은
바닥을 헤어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자루는 먹어치운 만큼
고스란히 토해놓는다
그건, 그의 일
입 하나로 하루를 산다
등의 너머는 그의 것이 아니어서
힘껏 달려가면 늘 뒷걸음친다
한 뼘의 직립도 세우기 힘든데
억지로 세운 등뼈는 가끔 고꾸라진다
그때마다 하루는 쭈글거린다
무얼 담아도 묵묵한 자루
마음껏 먹어도 체하지 않는다
자루에서 뼛조각 서걱거린다
혼자 세울 수 없는 헐렁한 뼈들
여럿이 함께 기대면 쉽게 세워진다
하루치의 시간과 바람이 들어
팽팽하게 조여 올 때
질기고 억센 바닥을 딛고
가파른 등뼈를 세운다
알고 보면 밤과 낮도
자루의 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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