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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흐린 저녁의 말들/임성용

에세이향기 2021. 9. 13. 21:41

흐린 저녁의 말들 

임성용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용기도 헌신도 잃어버렸다는 것/잊힌 사람이 되었다는 것무수하게 사라지는 저항의 말들/어디서나 기억에도 없는 낯선 얼굴들/당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흐린 저녁이 오고/중력을 잃은 바람은 나를 데려가지 않네


임성용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한다. 사실 미리 꼽아두었던 시들은 더 많았다. 막걸리를 먹고 울던 아내의 시. 조금 모자란 듯한 ‘광렬이’가 나는 참 좋다는 시. 기억하고 싶은 시들은 대개 구체적인 시였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그는 노동 현장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주로 추상이 아니라 구체에서 시를 구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살아있는 사람이나 실제 인생이 등장할 때 그의 시도 살아 숨 쉰다.

반면 ‘흐린 저녁의 말들’에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사건도, 대화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의 삶이 없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시 안에는 켜켜이 쌓인 인생의 종합이 들어 있다. 하루하루의 인생을, 그 낱낱을 여러 번 찌고 말려서 엑기스만 얻은 듯 구체적 삶이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오랫동안 인생의 골수를 탈탈 털어왔다고나 할까. 시인의 노고에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이 시의 묘미는 읽는 우리를 엄청 찔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워진 따뜻함과 오래 남은 경멸. 절망과 거짓말을 믿는 나와 타인들. 사랑할 능력의 상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고 나 자신을 겨냥한 이야기 같아 뜨끔 한다. 무엇도 잘못한 것 같지 않지만, 인생은 잘못 산 것 같은 날, 이 시는 우리 가슴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는다. 시가 좀 슬프게 읽히는 걸 보면, 따뜻하게 사랑하며 잘 살고 싶은 희망은 남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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