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구두 / 김남섭
그녀는 잠자리 꼬리 닮은 장대 위를 걷는다
걸음걸이가 부자유스럽다는 것 말고는
장딴지의 알통만큼이나 생이 당당하다
뒤축이 공중부양 할 때마다
현기증이 날 때도 있지만,
편안한 발꿈치 저 편에는
골병 든 발가락들이 넝쿨처럼 엉켜서 산다
걷기만하면 보도블럭에 딱총을 쏘는 여자
민들레처럼 낮아, 찔레처럼 치솟고 싶은 여자
증거처럼 발자국소리 내 던져버리고
발가락을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여자
세상을 휘저으며 걸을 때마다
삶의 껍데기를 곰보딱지로 만드는 여자
신발 / 이종완
오고감이 선명한
먼지 꽃 피어나는
그 길 위에
찍힌 발자국
지우고
또 새기며
가을빛 곱게 물들어 가는
어느 날 오후
그대도 나와 같이
단풍잎 같은
발자국 찍으며
숲길을 걸어갑니다
박물관에서 / 최준선
고요하게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는
꽃신은 누구의 것일까?
그대로 체취가 느껴질 듯한데
희고 결 고운 얼굴의 아씨가
신었을 거라고 믿으며
마음이 봄을 탄다
유물들 사이로 흐르는
서늘한 무게의 시간을 밟으며
꽃신의 주인은 몇 번이나
눈 위에 발자국을 찍었을까?
생각하니
내 마음에 한 줄기 꽃샘추위가 지나간다
봄 꿈 /홍승자
아련히 솟아올라 호접호접(胡蝶胡蝶)
살 부풀어 오르는 창가
생의 봄을 기다린 자들이
떼로 어우르는 춤사위
아주 짧은 꿈일지라도
그리움의 긴 꽃대 위에서 놀다
흔들리며 찰나에 깨어나고 싶은 황홀한 꿈
깨어난 꿈 아쉬워 말며
꿈인 듯 생시인 듯
지는 꽃도 설워 말며
피고지고 살고지고
봄날을 일깨우는 호접몽 一聲
[ 한라일보 시 당선작]
오래된 신발 / 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영남일보 시 당선작]
신발 / 차규선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신발을 잃다 / 이재무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는다
돈 들여 장만한 새 신 아직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 밖 나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렇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 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 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 쓰다가 제자리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고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곳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길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려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오래된 신발 / 황원교
1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들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
드럽게 흙을 묻히고 재수 없게 똥도 밟아보고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에도 풍덩 빠져보고
빙판에선 꽈당 미끄러져도 보고 싶은
오래된 신발 한 켤레.
24년째 흙 한톨 묻혀보지 못한 채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들고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발에 신겨 있다고 다 신발인가
제 발로 길을 걸어가야
제대로 된 신발 노릇 하는 게지
죽기 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거나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
마비된 사지(四脂)를 싣고 흰 구름처럼 둥둥
땅 위를 떠다니는 꿈이여!
2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는 짚신을 버렸고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버렸고
지난겨울 막내 동생도 현관에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영영 떠나버렸다
나도 언젠가 너를 버려야 하리
대문 밖 허공 속으로 길게 난 발자국들이
저렇게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신발을 신으며 / 이해인
발에 신으면 발신이지
왜 신발이냐고 우기던
어린 조카의 말을 생각하며 신발을 신습니다
무거운 나를
가볍게 지고갈 나의 신발에게
늘 고맙다는 말 잊지 않으면서
하루의 길을 가면
더욱 정겹게 살아오는 나의 이웃
반갑게 웃어주는 거리의 풍경
날마다 새롭게
낮은 자세로 신발을 신으면
높은 곳에 있던 행복도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사뿐히 겸손하게 내려옵니다
구름의 신발 / 차수졍
한무리의 구름이 간다
그림자에 갇힌 내게도
구름 속이 훤히 보인다
보드란 맨발이 보인다
구름의 신발은 어디 있을까
더 넓게 더 높이
가끔씩 소멸의 시간처럼
구름 사이로 잔광이 쏟아진다
내 삶의 무게를 하늘에 걸어두고
구름의 신발을 신겨주고 싶다
아내의 신발 / 이문조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뒷굽이 삐딱하게 닳아빠진
아내의 신발
못난 신발이지만
나에겐 가장 푸근한 신발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내의 신발이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내의 신발이 보이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우울하다
내 마음의 안식 아내의 신발
언제까지 저기 저 자리에
놓여 있을까
아내의 신발이 사라지는 날
슬픈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불안한 마음에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아내 몰래 가만히 만져 본다.
홀로 가는 길 / 오세영
어디서 떠내려 온 것일까
누가 신었던 것일까
홍수로 범란한 주택가 공지에
불현듯
떠밀려 온 신발 한 짝
한들한들
물결에 실려 어딘가로 떠가고 있다
이젠 다신 당신의 발에만 신기지
않으리라
길만이 길로 알고 걷지 않으리라
애착에 짓눌린 한 생의 무게를 버림으로써
홀로된 존재의 가벼움이여
이제는 그대 가는 곳 곧 가야할 길일지니
대 홍수로
한 세상 모든 인연을 풀어헤쳐
나
홀로 가는 길을 묻는다
四時長春 -김흥도와 놀다 1 /강현덕
뜰은 늘
봄
봄
또 봄
산은 늘
봄
봄
또 봄
쪽마루
신발 두 켤레
검은 마음
붉은 마음
저 방문
열면 안 될 듯
활칵 쏟아질
봄
봄
봄
청동소녀 / 김 별
소녀는 청동 옷 입고 그날처럼 앉아있다
치욕의 강점기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순결을 난도질당한 상흔들이 새나온다
가슴에 피어나던 목화꽃이 시들고
홍안이 일그러져 주름만 무성해진
할머니 세월을 애써 돌려놓은 저 자리
열도를 통째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청춘
금보다 귀한 사죄 한마디가 듣고 싶어
무거운 세월을 이고 들먹이는 저 어깨
누군가 옆에 놓아준 샛노란 신발 안에
기도의 눈물 넘쳐 동해로 흘러간다
슬픔을 나누어 가져도 슬픔뿐인 청동소녀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상가(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신이 신발인 까닭/ 유안진
발이 있어야
말은 말발이 서고
글도 힘센 글발이 되고
현이 없는 기타소리라도 발만 달아주면
소릿발이 되어 빗발을 불러오고
빗발은 서릿발로 다시 눈발로 몸을 바꾸고
눈에는 핏발이 서야만
시선도 눈길로 열려서 발길을 재촉해
발만 달아주면 마당도 마당발이 되어
끗발 날릴 수 있다니까
신을
왜 신발이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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