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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안도현

에세이향기 2021. 9. 7. 13:43

 

                                               라 마 승 1983, 148*92  /  운보 김기창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안 도 현

 

밤새워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

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키는 사람처럼,

다 벗어던지고 몸뚱이 하나 남은 겨울나무처럼

스스로 벌거벗기 위해 서 있는 것들이 있으니,

오로지 뼈만 남아 몸 하나가 밑천인 것들이 있으니,

 

2009년 올해 당신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것으로 부터 버림 받았다고 해도,

희망 같은 것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절망이 많으니, 절망을 재산으로 삼고,

절망으로 밥을 해먹고, 절망으로 국을 끓일 각오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흔쾌히 반성문을 쓰고,

살아갈 날들을 위해서는 빛나는 예지의 선언문을 쓰고,

누가 뭐라 해도 후진하는 법 없이,

요란하게 수다를 떠는 법 없이,

발소리를 남기지 않고 침묵으로 한 생을 밀고 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바람 찬 노숙의 새벽이여,

문풍지 사이로 스미는 바람소리여,

눈썹 끝까지 눈 쌓인 배추밭이여,

살얼음으로 감발하고 넘는 고갯길이여,

검은 기름띠에 휘감겨 우울했던 태안의 해안이여,

지난 가을 트랙터로 갈아엎은 배나무 과수원이여,

지금 비록 쓰러져 아플지라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겨울이라는 것을 알고,

그러나 겨울이 한 번도 봄을 이겨 본 적이 없다는

자연의 순리와 역사의 진보를 믿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땅속 깊이 묻어둔 김장독처럼 발효의 시간을 견디며,

비록 벌거 벗었으나 나무처럼 땅속에서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계절의 사선을 넘어 어둠을 넘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가라. 몸을 낮춰서 가지 말고,

어깨를 움츠리고 가지 말고,

힐끔힐끔 눈치 보면서 가지 말고, 당당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광목천을 가르는 가위처럼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과녁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가라. 바닥을 친 경제여,

바닥을 친 사랑이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아직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연못의 물고기도 되어 보지 못했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물속의 잎사귀도 되어 보지 못했으니,

밑바닥을 찾아, 근원을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 줄 알고 풀을 뜯는 저 소를 보아라.

우리 산하의 능선을 닮은 저 소의 등줄기의 곡선을 보아라.

욕심도 교태도 없이 실한 저 엉덩이를 보아라.

크고 순한 가식 없는 저 눈망울을 보아라.

저 소의 걸음걸이, 저 소의 울음소리를 따라 당신은 부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유 없이 끼어들지 말고,

남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말고,

당신 속에서 걸어가는 소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안  도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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