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남해
박지웅
꽃분을 깼다 삽시간에 신발 벗겨진 꽃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꽃은 생전 처음 제 발을 보았다
사막으로 쫓겨난 쓸쓸한 발이었다
마당 밖까지 맨발로 내쫓긴 날
나는 풀어진 보자기 같은 발로 겨우 꽃나무 아래까지 걸어갔다
발등에 하염없이 꽃그늘을 얹도록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길을 두고 머뭇거리는 일이 잦았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밀어내느라 그랬을 테지만
발아래 애먼 흙바닥만 문지르던 날
나도 누군가의 길을 허물었을 것이다
저 꽃분 속에도 꽃이 연 길이 있을 것이다
가만히 꽃의 발을 모아 신발을 신겨준다
헐거운 신에 맞추느라 꽃이 뒤꿈치를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는다
매실나무 아래 꽃신 한 짝 내려주는데 꽃배 같았을까
목깃에 묻은 흙 털어주니 때맞춰 멀리 나갔던 매실그늘이 돌아와 닿는다
그늘은 불어나고 더 밀려와 금세 발목까지 차오른다
몇 걸음 물러나서도 나는 뱃전마냥 끄덕거린다
저녁 바람에 문득문득 헐거워진 그늘 사이로 뒤채이며 멀어지는 꽃신 하나
밤새 매실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득음/박지웅
미꾸라지 백 마리쯤 넣고 굵은 소금 착착 치면
가마솥은 무거운 악기가 된다
고물거리던 손가락들이 소금 한 주먹에
휘감으며 죽을힘으로 연주를 시작하는 저녁
울림통을 두드리는 마지막 선곡은 그러나 끝내 죽음의 것이 아니다
나는 솥뚜껑을 누르고 있다
살갗을 뜯어내는 풍랑이 몰려오고 몰려가는 풍경과 옆구리가 옆구리를 토해내는 힘을, 솥 안에 분수처럼 터져 오른 곡선이 손바닥에 타들어오는 저녁을 누르고 있다
손가락들이 밑에 깔린 손가락을 들추자
죽은 건반이 살아 있는 건반들을 누르고 지나간다
죽어라 살 비벼 만든 마지막 물방울들
그것이 물거품일지라도 뒤척여 깨어질지라도
여기서는 아무도 건성으로 연주하지 않는다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름 돋는 연주를 누구도 망치지 않는다
손바닥에 들락거리는 괴이한 둥지의 음표들
온갖 짐승의 발소리로 날갯짓으로 요란하게 변하는 악보의 허리춤을 쥐고 나는 힘겹게 몸을 비튼다
아, 어느 생계가 저 음계보다 높고 찬란할 것인가
솥 가까이 귀를 댄다
모든 길흉과 생사를 건너온 무심한 악기
악사들이 튕기던 허공도 구기던 바닥도 사라져
환하고 미끄러운 숨통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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