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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고 사 목 / 고경숙

에세이향기 2021. 10. 2. 09:51

고 사 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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