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 가고 있다/이복희
가을은 겨울보다 더 쓸쓸한 계절이다. 그러기에 가수 최백호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라고 절규하지 않았을까. 열정이란 식고 나면 그런 것이다.
여름의 뜨거움이 갈 듯 말 듯 미련을 떨고 있지만 가을의 전조처럼 이미 바람결부터 달라졌다. 사실 여름은 견뎌내는 일만 해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감상에 빠질 겨를이 없다.
시월이 깊어지면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것처럼 가슴으로 바람이 마구 불어간다. 뜨거워서 허덕이는 여름이나, 한기에 움츠리는 겨울에는 존재감 없던 감상(感傷)이 늦가을엔 슬금슬금 사람을 흔들어댄다. 불현 듯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산에 신도시가 조성되기 전 잠시 행신리에 살 때였다. 지금은 고층아파트들이 또 다른 숲을 이루며 행신동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를 벗어나면 논밭이 질펀하고 멀리 행주산성 쪽으로 숲이 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계절이 아름다울수록 외로움은 버섯처럼 돋아나는 것 같다.
목적지도 없었으니 종점에서 내려야 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어렴풋이나마 거기쯤 가면 바람을 잠재우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하늘은 벌써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던 붉은 해가 눈을 맞추어도 될 만큼 너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이마에 닿는 바람이 위로의 손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발길도 끊겼고 해지기 전의 고요함과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만 텅 빈 들을 채우고 있었다.
논두렁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비낀 석양빛에 하루살이 떼가 무리를 지어 원을 그리며 어지럽게 날았다. 모두가 떠난 빈 들판에 내 존재는 갈 데 없는 침입자였다. 연신 손을 내젓지 않으면 금방 그것들에게 에워싸여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푸라기 냄새 같기도 하고 낙엽을 태우는 것 같기도 한 쌉쌀한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그러자 내 안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빈들을 닮아갔다. 대신 삽상한 기운이 마음을 채워주었다. 바람이 오소소 차게 느껴지고 옅은 구름이 하늘가로 몰리기 시작하며 날이 저물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까운 숲을 향해 떼 지어 날아간 새들처럼.
내 안에 일었던 바람을 그렇게 가을 들판에 풀어 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버스가 야산을 끼고 모퉁이를 돌 때 문득 산아래 쪽 길 가까이에 자리한 무덤 한 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앞에 놓인 하얀 국화꽃 한 다발이 거기가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옅은 어둠 속에서 국화꽃의 하얀 빛은 눈이 시리도록 호젓해 보였다. 무덤의 임자도, 꽃을 놓고 간 손길도 누구인지 알 리가 없지만 슬픔 같은 것이 날카롭게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가을의 쓸쓸한 기운을 가득 받은 후여서 그랬을까 그 광경은 마음에 사무쳤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하지만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하얀 꽃다발이 자꾸 나를 따라왔다. 누가 잠들어 있을까, 꽃다발을 놓고 간 그이는 잠든 사람과 어떤 사이였을까, 부질없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꽃 한 다발 내려놓고 돌아서서 가는 그이는 속으로 무슨 말을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왠지 또 알 것만 같았다.
‘잘 있어, 또 올게’
아니면 어둠이 깃든 야산기슭에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했을까. 다정하고도 쓸쓸한 한 마디 남기고 돌아섰을까.
끝내 돌아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아 친구의 무덤을 찾아갈 수 없었다던 예전의 그 사람 이 문득 생각났다. 팔팔하던 이십대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친구였다. 친구를 잃은 그 사람도 꽤나 외진 성격이어서 친구를 따라 가버릴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지던 기억. 하얀 꽃다발은 어쩌면 그 사람처럼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대신 두고 간 것일까.
살아서 잊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깊은 가을날 국화꽃 한 다발 들고 찾아와 준 누군가가 있기에 그 사람은 죽어서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문득 그날의 하얀 꽃다발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순간 가슴으로 지나가던 싸한 슬픔의 여운도 여전하다.
봉긋한 봉분을 보게 되면 알 수 없는 편안함에 마음이 끌리곤 했지만 이제는 봉분 하나도 차지할 수 없는 시절이다. 그런데 죽어서는 고사하고 살아 있는 지금도 꽃다발 하나 들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싶으니 피식 웃음이 난다.
해마다 그 한 달, 시월을 기다릴 만큼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기분이다. 마치 기다리던 그리운 이를 만나놓고 아무 말도, 아무 일도 못한 채 지나쳐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버리는 것처럼.
시월이 또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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