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신혼시절, 내게는 말 잘 듣는 세탁기 '예예'가 있었다. 그전까지와는 달리 전자동으로 만들어져 동작단추만 눌러 놓으면 저 혼자 빨래를 했다. 하지만 거기엔 치명적이 결함이 있었다. 전원 단추가 포함된 계기판은 습기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세탁실이 따로 없는 탓에 세면장 습기를 뒤집어 쓴 '예예'는 차츰 말을 듣지 않더니 얼마 못가 중병이 들었다. 몸에도 물기가 차면 마음에 한기가 들고 나중엔 앓아눕게 된다는 걸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겉만 번듯하고 속은 허술한 이국풍의 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집을 한 번 보고 대번에 전세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언덕에 유채꽃이 살가운 봄볕을 이고 푸지게 피어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봄날일 것 같았다.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샐러드 빵을 좋아하고 이른 봄 햇살을 반찬삼아 식탁을 차리는 철모르는 새내기 주부였다.
내 몸에 습기가 차기 시작한 건 그 집에 세 든 그날부터였다. 아래층에 사는 주인아주머니는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였다. 스스로 배운 게 없다고 내 뱉으며 아무렇게나 행동했다. 모순으로 똘똘 뭉친 그녀는 새로 지은 집이 닳을까 걱정스러운 나머지 위층에 손님이 오는 것도 싫어했다. 수시로 위층을 들락거리며 간섭하는 걸 일삼았다. 그녀는 남편이 출근한 틈을 타서 나를 힘들게 했다. 배운 건 없어도 머리 나쁜 여자는 아닌 게 분명했다. 늘 제 맘대로인 그녀 앞에서 나는 지은 죄도 없이 움츠러들었다.
또 다시 봄이 왔고 마법처럼 향긋한 바람이 창문으 두드려도 웅크리고만 지냈다. 유채꽃 핀 언덕도 더 이상 감미롭지 않았다. 따뜻한 사람들 속에 섞여 내가 간직한 웃음이 시드는 일 없이 살고 싶었으나 그 집에선 그럴 수 없었다. 평생을 뼈 빠지게 고생만 했다는 아주머니는 "무시라, 몬 살겠다."로 시작해 막무가내로 치달았다. 어쩌다 자신의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며 이제까진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영감님과 한 번도 애틋한 눈길을 나누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소리 내어 싸우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 집에 신혼의 부부가 세든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남편은 속사정을 알고 난 후에도 처음 계획한 기간을 채우자고 우겼다. 아내의 눈물을 못 견뎌 하는 터라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내 몸엔 차츰차츰 물기가 쌓여 그 집 앞을 가득 채운 저수지처럼 되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면 다른 장기가 대신 운다고 했다. 내 몸에 고인 물기로 인해 곰팡이 꽃이 피고서야 미적거리던 남편은 어영부영 짐을 꾸렸다.
환풍구마저 없는 세면장에서 아파하던 세탁기는 몇 번의 치료를 받았다. 서비스 기사는 매번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하루라도 빨리 습기가 없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집이 비좁아 따로 둘 곳을 마련하지 못한 나는 계기판에 스민 물기를 건조기로 말리는 일이 전부였다. 결국 현하기 위해 장만했던 전자동 세탁기는 습기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진 것들의 무덤으로 갔다.
나는 요즘 화덕 앞에 쭈그려 앉는 일이 잦다. 식구들이 씻을 물을 데우기 위해섣. '기름 먹는 하마' 란 별명이 붙은 우리 집 보일러 탓도 있지만 화덕에 불 지피는 일은 재미난다.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가져다 놓은 나무는 수북이 쌓여 있어 땔감 걱정은 없다. 화덕 앞엔 언제나 앙증스런 청이와 송이가 다소곳이 앉아서 숯불에 익어가는 고구마를 기다린다. 몸이 너무 뜨거워지면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다. 키우는 강아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은 어울려 살아가는 기쁨을 덤으로 준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양은솥은 눈물을 흘린다. 뜨거운 눈물은 솥전을 타고 흘러내린다. 참기가 힘들다는 신호다. 떨어진 눈물 탓에 화덕 앞이 흥건해지면 땔감을 거두고 불이 잦아들게 둔다. 화덕 안에 불빛이 사라져도 솥 안에선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제 숙련된 주부인 나는 솥 안에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까마득한 예전의 흘리지 못한 눈물을 생각한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습기가 차면 병이 든다는 징조다. 어서 비우든지 닦아내든지 하라는, 그래야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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