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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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놋그릇/서소희

에세이향기 2022. 2. 4. 11:13

놋그릇/서소희

 

 

 

 

놋그릇을 닦는다. 거친 수세미에 모래를 묻혀 서걱서걱 소리가 나게 문지른다. 온몸에 앙금이 되어 까맣게 붙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벗겨낸다. 검은 녹이 흩어지며 표피가 오래된 침묵을 밀어낸다.

저 작은 물건이 삶의 고달픔을 검은 녹으로 껴입고 있었던가 보다. 사지를 포박하며 피어났던 푸른 녹이 겹겹이 쌓여 꺼멓게 될 때까지 놋그릇의 운명도 묶여 버렸는지 모른다. 새삼 아무 꾸밈없는 소박한 물건이 한 세상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한참 만에 광택을 잃은 그릇의 표면이 거친 물질에 의해 땟자국을 벗어갔다. 우악스러운 손놀림만으로 누런색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녹이라는 것은 몸의 한 귀퉁이와 함께 헐어내야만 사라지는 것인 모양이다.

시간의 흔적을 헐어낸 자리에는 맑은 빛이 자글거린다. 상처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자신의 생살을 벗겨내는 아픔에도 비명은커녕 오히려 함박꽃 같은 속살을 드러낸다. 화려한 빛들은 골동품처럼 품위가 있어 보인다.

작년 가을 남편이 시댁에서 행색이 남루한 자루를 가져왔을 때 나는 몽니를 부리며 지청구를 하였다. 속속들이 먼지투성이인 자루에서 꺼내지는 물건은 흡사 붉은 화마가 지나간 뒤, 잿더미 속에서 건져진 것 마냥 도저히 처음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시간의 때가 두텁게 묻은 놋그릇이었다.

놋그릇은 제사상에 올라가는 제기였다. 갈 수 없는 고향 땅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버님의 뜨거운 한숨을 만들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무거운 입김이 공기와 만나 외롭고 고단한 녹을 피어나게 했던 모양이다. 당신 또한 검은 녹을 가슴속에 껴입고 사셨을 것이다.

아버님은 전쟁을 피해 홀로 남으로 내려오셨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며 평생을 할머님과 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워하셨다. 그러하기에 집안의 장자로서 조상님 모시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정성스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제사 때마다 놋그릇을 닦으며 아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셨다. 가슴속으로 잔물결처럼 차오르는 진한 슬픔과 아픔을 소처럼 새김질하며 함박눈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셨으리라.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 되면 정성을 다해 닦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 올리며 조상님들께 당신의 불효를 고했을 것이고, 북녘 하늘 밑에 두고 온 자식들과 가족의 안녕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손 내밀면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얼굴을 속으로 속으로 하얗게 삭이며 보고픔의 울음을 감추셨다. 그렇게 생긴 녹이 돌처럼 박혀서 아파도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비탈진 인생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한 귀퉁이를 빡빡 헐어내는 고통을 견디며 마음속의 녹을 닦고 또 닦으셨을 것이다. 밤새 산산이 부수어진 살점들을 긴 한숨으로 날려버리고 먼동이 트는 아침이 되면 자애로운 가장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삶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눈부신 초연함을 보여주셨다.

다행히 아버님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고향 땅을 밟았다. 그리고 할머님의 흑백사진을 가슴에 품고 오셨다.

“이제 여한이 없다.”

아버님은 밝게 웃으셨다. 생애의 풍랑을 견뎌내신 분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자식들은 세월의 멍에를 벗겨드린 듯했으니 모두들 더없이 기뻤다. 허나 바람 좋고 구름 높던 어느 날, 당신은 따스한 눈빛을 잔상으로 남기며 생애의 마지막 날숨을 내려놓으셨다.

어떤 일이던지 무심으로 하면 여러 가지 상렴이 안개비처럼 엉기어 내리는 모양이다.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기억의 흔적 때문인지 무연히 눈동자에 뜨거운 무엇이 고인다.

그러고 보니 때가 묻은 놋그릇은 나의 마음과도 닮아있다. 상한 음식을 놋그릇에 담으면 그릇의 색깔이 변색된다. 나 또한 상한 상렴들을 마음속에 담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조금씩 변색할 때마다 ‘다 그렇게 살아간다.’며 괘념치 않았다. 애오라지 나만을 위했기에 녹이 피어나는 것도 알지 못한 삶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지나온 삶을 한 겹 또 한 겹, 벗길 때마다 아픔이 되어 흩어진다. 두텁게 자리 잡은 녹을 조금씩 지우는 것이 이렇게 심장을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전류같이 아리하게 흐르는 통증을 지우려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고 놋그릇을 문지른다.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듯 손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환한 금빛 햇살이 피어난다.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이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철학적인 이론도 성현들의 가르침 아닌 모양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보아왔던 작은 생활 모습이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모습의 환영으로 피어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님의 그 인자하신 얼굴은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지나도 항상 같은 자리에 계신다. 내 마음이 아집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뜨거운 여름날의 바싹 말라버린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질 때마다 한권의 경전처럼 내 앞에 펼쳐지고는 한다. 그리고는 ‘세상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던져준다.

한세상이 잠깐인데 부질없는 집착에 매여 시들어가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저 먼 별나라에서 아버님이 나에게로 놋그릇을 보내셨는가 보다. 놋그릇을 경전처럼 펼쳐보며 삶을 선택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무릇 물건이라는 것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퇴색되기 마련이다. 놋그릇은 그런 법칙에서 자유롭다. 손이 자주 가면 갈수록 고풍스러운 빛이 난다. 허나 공기가 있고 놋그릇이 존재하는 한 녹은 끊임없이 돋아날 것이다.

인생은 때때로 무엇을 숨겨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놓는가 하면 삶의 무게에 넘어지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공기를 받아들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 조금씩 조금씩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한 삶의 녹은 끊임없이 번식할 것이다.

내 마음이 독단과 독선으로 비틀거릴 때마다 마음의 녹을 지우듯 놋그릇을 닦고 싶다. 놋그릇에 묻어있는 아버님의 손길을 느끼며, 당신의 어질고 자애로웠던 마음을 배우고 싶다. 닦을수록 빛나는 작은 민패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긍정의 자세를 되새기고 싶다. 힘찬 손길이 갈 때마다 빛깔의 청결함을 드러내는 놋그릇처럼 나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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