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분이/김아가다

에세이향기 2022. 2. 4. 14:58

분이/김아가다

 

 

곱다. 꽃 속에 파묻힌 어머님이 웃고 계신다. 향년 100세. 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썩하니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너도나도 망자와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사진 속을 걸어 나온 어머님이 기웃거리며 자손들 이야기에 참견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무연히 타고 있는 향불 연기 속에서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른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께 생신을 축하드린다면서 꽃바구니를 안겨드렸다.

“오늘이 이월 열사흘이냐?”

그 말씀에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정신 줄을 놓으시더니 자식도 못 알아보고, 아득한 과거 속으로 묻혀 지낸 지 오래되었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생일의 기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월 열사흘은 어머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한 본능일까, 해마다 추억된 학습의 기억일까. 이월 열사흘, 세상에 온 그날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한 평생 자신을 지탱할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은 문맹이다. 그렇지만 일흔 살에 미국의 딸네 집에도 다녀오셨다. 미국까지 가는데 내 이름 석 자는 알고 가야지 하시면서 글자를 익혔다. 입국심사를 받을 때 서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은 마음이 바빠졌다. 까막눈이 한이라면서 신문지 한 장에 이름 석 자를 빼곡히 연습했다. 평생 처음 잡아보는 연필이었으나 어머님의 열정은 눈물겨웠다.

여장부이신 어머님은 더 넓은 세계가 궁금했다. 젊은 나도 도전하기 두려운데 노인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대단했다. 어머님의 미국행 준비를 하려고 시장에 다녀왔다. 고춧가루, 김, 멸치, 미역 등을 쇼핑백 가득 짊어지고 들어오는 나를 어머님이 반가이 맞으셨다. 연필로 머리를 긁으면서 신문지를 내미는 표정 속에 한숨도 끼어들었다.

“아가, 내 이름이 조금 다르지.”

신문지에는 ‘허분이’가 ‘허분10’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웃다가 울다가 했다. 어머님의 배우지 못한 한이 안타까워서 울고, 그 열정에 감탄하여 응원하면서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장난삼아 어머님을 ‘허분10 씨!’라고 불렀다.

 

휴스턴으로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었다. 요금이 저렴한 외국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갈아타는 여행이었다. 가슴에다 초보 여행자라는 표지를 달고 안내를 받았다. 무사히 미국 땅에 도착한 어머님에게 한국의 가족들은 손뼉을 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머님의 표현에 의하면, 같은 비행기 안에 탔던 노랗게 생긴 사람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고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은 어머님의 생존 법칙이었다.

지혜롭고 명석하신 어머님은 미국에 살면서 에피소드를 여럿 만들었다. 노인끼리 당신 집의 차는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면서 딸에게 우리 차 이름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 ‘Mercedes Benz’라고 말하자 어머님의 두뇌 회전은 빠르게 돌아갔다. ‘옳지 모서리를 돌아가면 변소가 있지.’ 다음날 경로당에 가서 “모서리 밴소”라고 얘기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또 한 번은 옆집에 사는 미국 노인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영어도 못 하는데 자꾸 더 먹으라는 손짓을 하니 어머님은 진땀이 났다. 눈치를 챈 딸이 ‘아임 소 풀’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무릎을 탁 치면서 ‘맞아 암소가 풀을 많이 먹으면 배부르지.’ 바로 “암소 풀~”이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굳건했고 당당했다. 대농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자신감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했다. 시시한 남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쌀 한 가마를 거뜬하게 짊어지는 여장부였다. 치마를 입어서 여자이지 장정 몇 몫을 하셨다고 했다. 아들을 못 낳아서 소박데기가 된 친정 모친의 한이었고 딸로 태어난 삶의 오기라고 할까.

어머님은 좋게 말하면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고, 흉을 보자면 지독한 구두쇠였다. 바느질도, 요리도 서툴렀던 신혼 초에 낡은 순모 티셔츠를 내 앞에 내놓으셨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팔을 잘라서 다리를 만들어 내복으로 입으라고 했다. 어떻게 할지를 몰라 친정엄마한테 가져갔다. 바느질을 잘하던 엄마는 단숨에 가위로 쓱 잘라내더니 윗도리로 아랫도리를 만들어 냈다. 저 시집을 어떻게 살까 걱정되는지, 엄마 눈에 이슬이 맺혔다. 대단한 어른이니 살림을 여물게 배우라고 일러주었다.

까막눈이었던 어머님의 생활 방식은 예술이었다. 하루는 금고를 열더니 몇 가지 문서를 보여주셨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집문서에는 용마루까지 얹어놓은 기와집이, 산 문서에는 어느 화백의 ‘바보 산수’ 같은 그림이 봉투마다 그려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공과금의 영수증이 색깔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노란색은 오물세, 파란색은 수도요금, 하얀색은 재산세. 어머니가 가꾸시는 지혜의 숲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십 년 전이었다. 성정이 차분하고 정갈한 어머님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당에 다녀오시다가 길을 잃어서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는 화장대 위에 있는 클렌징크림 한 통을 다 먹어 치웠다. 종내에는 사람을 의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더니 당신의 금 브로치를 가져갔느냐고 나를 닦달했다. 자식들이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어머님의 병이 치매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은 대전에 사는 큰 딸네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이 되었다. 고령의 노인인지라 수술을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분이는 아들 못지않은 삶을 살았고 소작에서 지주로 수성 뜰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며 한평생 당당했다. 외아들인 신랑에게 시집와서 아들 여섯에 딸 둘을 낳아 시부모님께도 기쁨을 안겨드렸다. 분이는 이제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기가 되어서 머리카락도 검은색이 더 많아지고 눈빛도 초롱초롱하던 어머님이 하늘의 천사가 되었다.

 

백 년, 한 세기가 끝이 났다. 세기의 끝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가 새록새록 풀어 헤치고 나온다. 결혼 준비를 하는 나에게 예단으로 차렵이불 네 채를 더 얹어오라고 하셨다. 궁금했지만 새색시는 시키는 대로 했다. 시집살이에 적응하느라 고달픈 어느 날 안방으로 어머님이 나를 불렀다.

 

아가, 음력 이월은 영등 할매가 오시는 바람 달이다. 영등바람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절기에 북서풍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람이다. 그래서 이월에는 바람을 재워달라며 영등 할매와 해신에게 바치는 풍어제가 열린다. 여자가 바람 달에 태어났으니 그 팔자가 오죽 드셌겠냐. 내 이름은 분이다. 울 어매가 지었다. 한자의 음이나 뜻도 없이 그냥 분해서 분이라고 지은 게지.

 

내가 울 어매 뱃속에 있을 때 누가 봐도 산모의 배가 남산만 하고 뒤태가 두루뭉술해서 아들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아베는 기분이 으쓱했단다. 들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으레 주막을 들렀다. 요번에는 아들을 보겠다는 말이 아베를 들뜨게 했다. 조상님께 낯을 들게 되어 한시름 놓았다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어깨춤을 추었다. 그날은 말만 잘하면 너도나도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먹었다. 사대 독자가 대를 잇게 되었으니 아베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신명이 났다.

어매의 몸에 태기가 왔다. 아베는 목욕재계하고 조상님께 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툇마루에 좌정하고 하마 소식을 기다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 큰 것일까. 머스마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태어난 아기가 가시나였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면서 애꿎은 담배를 쪽쪽 빠는 소리를 들으며 울 어매는 하늘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다 녹았다고 하더라.

아들을 낳으면 끓여주려고 사다 놓은 북어를 아베는 다듬잇돌 위에다 놓고 팍팍 두드려 발기발기 째면서 욕을 했다. 아들도 하나 못 낳느니라고! 그놈의 아들이 뭣인지, 점잖던 아베 입에서 오만가지 흉한 말이 튀어나왔다. 북어 대가리까지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씹으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댓바람에 비운 아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도 아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매는 퉁퉁 부은 몸으로 삽짝을 열고 고샅길로 나가 목이 빠지도록 아베를 기다렸제.

하루 이틀,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대로 잠적할 것을. 며칠 있으니 고향 남산골이 휘딱 까뒤집어졌다. 동네가 난리 났니라. 우물가에서 떠드는 소리가 산모의 안방까지 들렸으니 얼마나 우세스러웠겠노. 어매는 죽고 싶었다더라. 까딱했으면 나도 어매도 이 세상 사람 아닐 수 있었다. 기가 막히제. 아베가 이웃 마을에 사는 아들 셋 낳은 여편네 손목을 잡고 멀리 달아났단다.

남의 집 행랑채에 곁방살이하던 그 집 여편네와 아베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징글징글하게 없이 살다가 돈을 보고 팔자 고쳐먹었는지 누가 알겠냐. 아베에게는 남한테 꿀리지 않을 만큼 재산이 좀 있었단다. 아베는 대를 이을 씨앗이 그렇게 소중했는가 보더라. 나한테는 두 살 많은 언니 연실이가 있다. 첫딸이라 이름이 참하다. 겨우 딸 둘인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성질도 급한 기라. 내 이름은 저절로 이빨을 앙다물게 된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불러본다. 분이! 그러면 웬만한 일은 다 잊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내 삶의 오기였다.

 

여자를 도둑맞은 여편네의 남자는 내 아베를 찾으려고 전국을 떠돌며 엿장수를 했다. 충청도 내륙 깊은 산골짝에 꼭꼭 숨어 사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아낼꼬. 그네는 전국 방방곡곡 삼 년을 찾아 헤매다가 파김치가 되어 고향 남산골로 돌아왔다. 술과 담배로 병이 든 남자는 얼마 못 살고 죽었단다. 그 집 아들 셋은 노모의 손에 커다가 뿔뿔이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졌다고 하더라. 아들 못 낳아 소박데기가 된 어매 역시, 사람들 보기가 남세스러워 언니와 나를 데리고 살던 곳을 떠났다.

아베가 집과 전답의 문서를 다 들고 나갔으니 맨몸으로 돌아간 곳이 어매의 친정이었다. 딸년 둘 데리고 돌아온 친정이 뭐 그리 편했겠노. 남의 집 행랑채에 들어 품앗이하면서 근근이 목구멍에 풀칠만 하고 살았다. 먹고 살기가 힘든 어매는 열네 살 먹은 언니를 시집보낸 후 아홉 살짜리 나를 데리고 자식 없이 홀아비가 된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재가한 어매는 내리 아들 둘을 낳아 한을 풀었다. 조그만 고추에서 오줌이 나오는 것이 참 신기하더라. 나는 너무 좋아서 그 남동생을 등에서 내려놓지를 않았다. 어매는 매일 들에 나가고 고추 달린 동생 둘을 내가 업어 키웠다. 내 나이 열여덟에 가마 타고 시집가는데 동생들이 문 앞까지 뒤따라와서 울고불고했다.

나는 내 이름값을 하고 사느라 이를 악물고 살았다. 경산 솔정고개 넘어 덕산동에서 대구 하동으로 시집왔다. 그때부터 택호가 ‘덕산 댁’이 되었지. 커다란 기와집에 부칠 논이 서너 마지기, 채소를 갈아먹을 밭떼기가 몇 마지기 있는 집이었다. 인물이 둥실한 보름달같이 생겨서 덕성스럽다는 소리를 사람들한테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신랑이 삼대독자라고 하니 아득하더라. 내 어매처럼 소박맞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역시 나는 분이가 맞다. 천지신명이 내 분을 풀어주었는지, 용을 쓰지 않아도 아들을 술술 여섯이나 낳았다. 친정 어매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들에 포원 진 어매한테 기를 살려 준 셈이다.

아베가 집을 나간 지 스물다섯 해가 되던 어느 날, 젊은 총각 둘이 찾아왔다. 어떻게 수소문해서 내가 사는 곳을 찾았는지 아연실색했다. ‘김해 허씨’며 동생이라고 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기가 막히고 분한 생각이 들어서 당신들을 모른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는 아베가 먼발치에 서 있었지만, 대문을 닫아걸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베고 뭐고 생각나는 대로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내버릴 때는 언제고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아베는 미웠지만, 핏줄이 무엇인지 훤칠하고 예의 바른 동생들이 궁금했다. 대문에 옹이 빠진 구멍으로 바깥을 살며시 내다보았다. 진짜 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희한하제. 업어 키운 동생보다 핏줄이 같은 아베의 아들에게 마음이 자꾸 끌리더라. 그들은 사흘을 여관에 머물면서 우리 집에 매일 찾아왔다. 대문 바깥에서 아베가 용서를 청했다. 죽기 전에 동생을 인사시키려고 왔다는 소리에 내 마음이 무너졌니라.

 

고집을 부리며 버티지만, 관솔 구멍으로 바깥을 훔쳐보는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신랑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희한하더라. 내 아베를 안방으로 모시고 절을 넙죽 하는 신랑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는가 보더라. 어매가 낳아준 동생은 사랑과 보살핌으로 키웠고, 아베가 낳은 동생은 생면부지였는데 자꾸 그 동생들에게 정이 쏠리더구나. 신랑은 삼대독자다. 친척이 없다가 진짜 장인과 처남 둘이 새로 생겼다고 억수로 좋아했다. 핏덩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떠난 아베가 조상님 볼 면목이 생겼다면서 뻔뻔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나도 자식을 낳아보니 그 마음 이해가 가더라. 좀 복잡하지만, 아베와 어매가 낳은 남동생이 넷이나 된다. 잘 알아 들었제. 아가, 여기까지가 차렵이불 속사정이다.

 

백 년 전 어머님이 태어난 시절은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난 시대가 아니었던가. 오로지 대를 잇겠다는 염원으로 조강지처를 버린 아베의 양심도 고달팠으리라. 그리하여 열매를 얻은 그 씨앗은 또 씨를 뿌리고 지구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씨를 남길 것이다.

 

아가, 또 한 가지 말할 게 있단다. 분하다. 부끄럽지만, 내가 낳은 자식 여덟에 들여온 피붙이 하나 보태서 내 밑으로 모두 아홉 자식이 있다. 부산에 사는 시누이 말이다. 왜정시대 때 종로에서 빠찡꼬를 할 때였다. 셋째를 낳고 가게에 못 나가게 되어 사람을 하나 두었단다. 청소도 하고 계산도 하라고 들어온 처녀가 네 시아버지와 배가 맞았다. 한 치도 의심 없이 지냈는데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꾸 내 귀에 들렸다. 사람들이 귀띔을 해줘도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입성이 초라한 여자가 찾아왔다. 안방으로 들어온 여자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녀의 모친이었다. 딸이 이 댁의 핏줄을 낳았는데 산바라지 할 돈이 없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억장이 무너지더라.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지르며 쫓아냈다.

괘씸하고 분했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모친을 보니 막되어 먹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집을 수소문해서 산모가 먹을 미역과 쇠고기 그리고 쌀 세 가마니를 소달구지에 싣고 찾아갔다. 찌그러진 움막에 모녀가 살고 있더라. 산바라지가 시원찮아서인지 누렇게 뜬 얼굴을 한 젊은 년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래도 염치가 있었던지 내 앞에 다소곳이 큰절을 하더구나. 두 집 살림을 차릴까 덜컥 겁이 나더라. 자식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있는데 이 일을 어찌할까,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했다.

 

“너나 나나 팔자가 사나워서 인연이 이렇게 되었구나, 어서 몸이나 추슬러라.”

그 말만 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영감한테 한 마디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때는 웬만큼 돈 있는 남자들은 첩실 하나쯤은 두고 사는 시절이었다. 더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참아야 했다. 아예 대놓고 살림을 차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난 뒤 젊은 년의 모친이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찾아왔다. 야단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줄 알았는데 점잖게 돌아왔으니 미안했던 모양이다. 어찌나 가슴을 치면서 울던지 나도 같이 울었다. 나도 자식 키우는 어미이니 말하지 않아도 그네의 심정을 이해하겠더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다시는 얼쩡거리지 않겠다고 했다. 부잣집 겨드랑에 붙어 팔자 좀 고쳐보려고 하다가 제풀에 꺾인 게지. 젊은 년의 모친은 딸을 다른 데로 시집보내겠다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약속했다. 인생이 불쌍하더라. 그래서 돈을 좀 마련해서 건네주었다.

그 후 소식은 젊은 년이 폐병에 걸려서 죽었다더라. 옥이는 내 자식으로 호적에 올리고 키워서 시집보냈다. 키운 정도 정이더라. 낳지 않았지만 내 손으로 키운 딸이니 똑같은 자식이다. 옥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옥이 팔자도 기가 막힌다. 초가을이었는데 웬 총각을 하나 데리고 왔다. 배는 불룩하고 옷도 없는지 여름 반소매를 입고 벌벌 떨면서 둘이 왔더라. 동네 사람 알 까봐 얼른 끌고 들어와서 옷을 입히고 집에 재웠다. 한 달간 데리고 있다가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옥이는 그 이후로 친정에 발길을 끊었제. 지지리도 없는 남자를 만나서 고생을 푸지게 한다고 소문에 들리더라. 아가, 남자들은 마음에 정분이 나서 색을 탐하기보다 본능이 앞서서 저지른다고 한다. 너도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럴 때는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그 아비 핏줄이니 어련하겠냐. 내 한평생 그런 염려하면서 살았다.

 

삼대독자 집안에 아들을 여섯이나 낳아주었는데 나한테 소홀히 해서야 되겠냐. 외아들로 자란 영감은 자신밖에 몰랐다. 맛난 음식, 좋은 옷, 대접받는 것 좋아했다. 돈 잘 쓰고 술 잘 사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용두방천에 보를 막는 일에도 한밑천 갖다 넣었다. 사람들이 추켜세우면서 잘한다고 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징, 북, 장구, 꽹과리. 사물놀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량이었다. 기생집에는 오죽 들락거렸을까. 알고도 모르는 채 들어도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다. 그뿐 아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겠노. 글을 쓸 수 있다면 책 한 권은 넘을 게다.

 

집안 큰살림에 자식은 많지 들어갈 돈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세상일에 촉이 빨랐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하던 중에 집안 아저씨가 돈 넣고 돈 먹는 빠찡꼬를 소개했다. 뭣인지 잘 모르면서도 돈이 된다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다. 돈 벌어서 땅 사고, 밭 샀더니 부동산이 자꾸 불어나더라. 친정 아베가 가지고 떠난 전답 문서가 생각이 나서 그랬다. 요샛말로 하면 트라우마라고 하제. 비옥한 수성 뜰이 전부 내 것이 되더구나. 돈은 내가 벌었는데 일일이 영감한테 말하고 타 써야 하려니, 나 원 참 더러워서. 금고에 돈을 꽉 채워놓고 혼자만 야금야금 썼단다.

신명 많고 흥이 많은 영감은 인기가 있었다. 인물 좋고 기운 좋아 전국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두 번이나 탔단다. 왜정 때 일본 순사를 개 패듯이 패준 적도 있다. 쥐뿔, 애국자인 척 주먹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못마땅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살 부딪히고 사는 영감인데 어쩌랴. 고추를 못 달고 태어나 버림받은 한이, 나를 억세고 강하게 살게 했는지 모른다. 분함에서 너그러움도 같이 습득한 모양이다.

내가 평생 살면서 영감한테 딱 한 번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홀시어머니에 외동아들은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다. 내가 아무리 잘해 드리려고 노력해도 흉잡고 삐치는 시어매를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청상에 혼자되어서 아들 하나 믿고 살았으니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동네에서도 게살궂은 어른이라고 소문이 났더라. 이웃집 제삿날은 어찌나 여물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더라. 음복하러 오라는 기별이 없으면 뒷짐 지고 제사 지낸 집 앞에 얼쩡거리면서 잔소리를 했다. 진중하지 못한 어른 때문에 남세스러운 것 말도 마라.

동이 트면 들에 나가 해거름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부엌이 싸늘했다. 불이나 때놓고 가마솥에 물이나 한 솥 끓여놓으면 좀 좋을까. 아랫목에 드러누워 내다보지도 않았다. 허둥대며 저녁을 준비하는데 밥상 올리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리더라. 피우던 장죽을 재떨이에 탁탁 치는 소리가 나면 성질났다는 신호다. 속에 천불이 나지만 어른이라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어른 말씀 하시는데 대답하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더라.

 

마침 영감이 집에 들어오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앞뒤 경우도 살피지 않고 부엌으로 쫓아와서, 들고 있던 삽을 나한테 던졌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는데 피할 겨를이 없었다. 말도 마라, 머리를 맞았는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라. 오기가 발동했지. 이놈의 집구석 제대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피가 얼굴로 타고 흘러내려도 꼼짝 않고 노려보았다. 영감이 오히려 놀래서 피를 닦아주고 난리가 났다. 그 시절에는 병원은 생각도 못 할 때였지. 된장 한 덩어리를 퍼 와서 머리에 싸매주더라. 자식들은 울고불고 집안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그때 영감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짓은 잘했던 것 같다. 분이 좀 풀리더라. 여자라고 숨도 못 쉬고 살아서는 안 된다. 옳은 일은 끝까지 옳다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뙤창으로 바깥을 살피던 시어매는 놀랐는지 다음부터는 별나게 닦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노망들어서 벽에 똥칠까지 했다. 똥 수발 삼 년을 시키더니 북망산천으로 떠나셨다. 나는 며느리한테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다고 그때 맹세했었다. 자식들이 그때 놀래서 아직 제 마누라 두들겨 팬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너그러운 시어미가 되려고 나도 숱하게 노력했지만, 며느리들은 섭섭한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너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다오.

 

아가, 아들 많이 낳은 내가 보속할 일이 많다. 하나같이 제 아비 닮아 성질 급하고 힘이 불쑥거리니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들놈들 전부 정관수술 시킨 것도 이유가 있었니라. 아랫도리 힘까지 불쑥거려 바깥에서 씨앗 받아올까 봐 애면글면 살았니라. 그래도 내가 누구냐. 천하의 ‘허분이’다. 하나도 삐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제 몫을 하면서 살도록 키웠지 않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더니, 이놈을 다스리면 저놈이 껄떡거리고, 말도 마라. 첫째와 둘째는 점잖고 심성이 곱다. 셋째부터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제. 돈푼깨나 있고, 사는 것이 번듯하니 자식들이 세상 있는 폼은 다 잡고 다녔다. 잘생긴 내 아들들 대구 시내를 주름잡았니라.

부모가 돈 벌었는데 쓰는 놈은 따로 있더라. 힘자랑하는 저거 아버지를 닮아 건들거리고 다녔다. 주머니에 손 빠르게 넣어 돈 쓰는 시늉은 어찌 그리 빼다 닮았는지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돈 내는 꼴은 못 본다. 돈 먼저 내는 놈이 잘난 놈이라고 생각하는지, 나 원 참. 그 꼴 보는 내 심정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더라. 손톱 밑이 여물도록 살았는데 내 고생을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

 

재산을 억척같이 끌어모은 것은 이유가 있다. 천석꾼 만석꾼이 되어서 아베한테 복수하고 싶었지. 아들만이 집안의 대를 이어가고 가문을 빛낸다는 것은 오산이다. 아베의 아들인 ‘허씨’ 성을 가진 동생들이 내 돈을 빌려갔지만, 꿀꺽 삼킨 것도 제법 있다. 나는 치마를 둘러 여자이지 남자가 하는 일은 모두 해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여장부라고 하더라. 신랑도 데데하게 놀면 한마디로 매조졌다.

“달고 있으면 뭐 하노, 남자 행실을 제대로 하시오!”

하고 호령을 했다.

산을 하나 넘으면 강이 나오고 그 강 건너면 또 더 큰 산을 넘어야 하고, 한고비 두 고비 겪어낸 세상살이 고달팠다. 나도 어지간 하제. 왜정시대를 살아냈고, 광복과 6.25동란을 거치며 시대의 격랑을 다 헤쳐 나왔다. 까막눈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옆 가지에서 싹이 턴 자식까지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다.

옛날에 우리 집이 대봉동 미군 부대 곁에 있었다. 영어를 배운 첫째와 둘째가 미군 부대에 취직해서 우리 집에는 미제물건이 풍족했다. 그것도 은근히 자랑스럽더라. 아마 좀 우쭐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햄, 커피, 맥주. 꼬부랑글자가 적힌 상품을 대청마루에 있는 자개 찬장에 넣어놓고 좋아했지. 냉장고가 많이 없던 시절에 도시바 냉장고가 우리 집에 있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했지. 못 배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 자랑밖에 할 수 없더구나.

자식 여덟 키우는 동안 내 속을 제일 많이 긁은 자식이 일곱째 네 신랑이다. 내 복사뼈가 왜 이리 딱딱하고 굳은살 박인 줄 말해줄까. 그놈은 나가면 사고를 쳤다. 누구를 두들겨 패든지, 야간통행 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있든지. 하이고 몸서리난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또 우리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 꿇고 성모님께 기도했다.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우리 아들 지켜달라면서 등짝에 땀이 물처럼 흘러내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내 기도 덕분에 저놈이 그래도 인간 구실을 한다. 저놈 철들 때까지 꿇어앉은 내 복사뼈가 이렇게 흉하게 되었다. 아가, 한 번 봐라. 거북이 등가죽 같제. 그래도 그놈이 제일 효자이기는 하지.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더냐. 전부 서울로 떠났지만 일곱째는 나랑 살잖아. 사고를 치면, 감옥 보내지 않으려고 합의금으로 들어간 돈이 집 세 채쯤 된다.

 

사람 됨됨이만 그릇되지 않는다면 그다지 살아가는 데 문제 삼을 일은 없지 않으냐. 범죄자의 신원을 조회하면 빨간 줄이 그어진다고 하더라. 그놈의 빨간 줄이 자식 인생 갉아 먹는 줄 알고 애간장 태운 것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대마초 사건이다.

얼뜨기 같은 놈이 제 이모 집에 가서 사고를 쳤다. 소죽 끓이는 아궁이 벽에 삼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거 뭐냐고 물었다. 이모가 ‘대마초’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놈이 이모 몰래 한 줌 떼어 갔니라. 참 시건 없제. 시내에 돌아다니는 껄렁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이모 집에 대마초가 있다고 속닥거리며 자랑을 했단다. 그놈이 한창 담배에 맛을 들일 때였다. 패거리들과 삼 이파리 한 줌을 양담배 한 보루와 바꾼 것이다.

못난 놈, 제 신세 망칠 줄 모르고. 한창 연예인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될 때였지. 그놈들이 봉덕동에 있는 봉봉 여관에서 대마초를 빨다가 인검 나온 경찰에게 들켜버렸다. 저희만 붙잡히면 될 것을 일곱째 이름을 불어서 순경이 찾아왔다. 그때는 심문과 고문이 심했다고 하더라. 말도 마라 순경이라는 신분증을 보여주는데 내가 알기나 하나, 이 또한 무슨 일인고 싶어서 얼마나 떨었던지, 아래턱이 얼얼하더라.

이모 집 툇마루에 서면 범물동 종점이 보인다. 순경을 앞세우고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일곱째 같다고 우리 집에 전화가 왔더라. 자초지종 이야기할 새도 없이 빨리 삼을 태우라고 내가 소리를 질렀제. 이모는 기함하고 삼을 걷어서 쇠죽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수갑에 채여 골목에 들어오는 것을 본 이모는 온몸이 삼발이 사발이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단다. 순경이 다짜고짜 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길래, 소가 설사를 해서 삶아 먹였다고 했다. 조카가 물어서 “대마초”라고 한 것이 잘못이니 선처해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었다. 잘못하면 이모도 잡혀갈 뻔했다.

대학생이었으니 감옥에 가면 장래도 문제가 되겠지만 가문의 똥칠이었다. 그놈을 빼내려고 여러 군데 줄을 대느라 집 한 채가 또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다른 자식들한테 말 못 한 사건도 수두룩하다.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가 번 돈으로 해결했으니까 괜찮다.

 

아가, 내 인생에 눈앞이 아찔한 일이 있었다. 천주님을 믿지 않았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될 뻔했다. 빙의라고 했던지, 무병이라 했는지 잘은 모르겠다. 병명도 없이 내가 많이 아팠다. 점을 보고 굿판을 벌여도 소용이 없었다. 자식은 줄줄이 있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돈이 있어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무병이다. 조선천지 용한 의원을 다 만나서 진맥을 해도 내 병을 알아내지 못했다.

 

먼 일가 중에 점바치가 하나 있다. 그 사람이 내 꼴을 보고 신우대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신내림을 받으라고 했느니라. 기가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살자고 자식들 앞을 가로막아서야 되겠냐. 무당 새끼 만드는 것은 절대 못 할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겠다고 버티었다. 온몸이 퉁퉁 붓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으니 산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하루는 옆집에 사는 노인네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성당에 가서 천주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녀도 병명도 모르고 낫지를 않았는데 긴가민가했다. 우리 집은 사대 봉제사를 지내는 집이다. 성당은 제사도 지낼 수 있다는 소리에 영감의 귀가 번쩍 띄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기로 마음먹고 옆집 노인네를 찾아갔다. 그 양반이 매일 삼덕성당에 나를 데리고 갔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걸을 수가 없어서 소달구지를 타고 갔다. 글도 모르는 내가, 귀로 듣고 입으로 달달 교리문답을 외웠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살려만 주시면 가족들도 모두 천주를 믿게 하겠다고 빌었다.

일 년을 다니다가 세례를 받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매달린 기도를 하늘이 들어주셨지. 그날 기적이 일어났느니라. 집으로 오는 도중에 치맛말기가 스르르 풀어졌다. 참말로 놀랍제. 붓기가 있던 몸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 쏟아냈다. 오줌을 싼 줄 알았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이 가벼워져서 사뿐사뿐 걸어서 집에 왔다.

그 물은 눈에서도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식구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단다. 저승 문 앞까지 간 사람이 천주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그때부터 가족들이 모두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천주님을 믿고부터 우리 집안이 평안했다. 영감도 세례를 받고 대봉성당 전교 회장까지 했단다. 이날까지 내가 성당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는 이유다. 참 많은 축복을 받았다. 아가, 매일 감사 기도를 잊지 말아라. 너도 세상을 살다 보면 순간순간이 주님의 안배하심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하더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 번 그릇되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베한테 버림받고, 이를 악물고 독하게 살았더니 신랑이 엉뚱한 짓을 했다. 또, 자식들은 별수 있겠냐. 부모가 밑거름 되어 준 것을 아느냐 말이다. 저 혼자 잘 자란 줄 알고, 머리 굵어지면 부모를 헌신짝 버리듯 관심도 없다. 손가락 마디마디 굽어지고 등이 휘어진 것을, 나이 먹어 그렇다고 뒷집 개 짖는 소리로 듣고 있으니.

 

내 한 세상 살아온 것을 뒤돌아보니 바들바들 떨면서 보낸 시간이 분하다. 버림받아 분해 떨고, 아까워서 바들바들 떨고, 늙어 기운 빠져 부들부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떨고 살았다. 이제는 저승 가서 지은 죄 심판받으며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겠제. 그래도 할 말은 하고 가야겠다. 그 많은 재산, 자식들 나눠주고 달랑 요양병원 침상에 누운 것이 내가 가진 전부구나. 빈손이다.

촛불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오늘이 시월 열사흘이구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좋은 때, 좋은 시절에 가겠다고 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다. 이승의 끝자락에서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신새벽이라 아무도 없더구나. 자식들은 한 놈도 보이지 않고 불러도, 목이 쉬도록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날 데리러 온 사람이 문밖에 서 있더라. 할 수 없이 입고 있던 껍데기를 벗었다.

아가, 욕심 내려놓고 미운 사람 용서하며 맺힌 것 풀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돌아보니 전부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하게 자린고비로 살았다. 아귀같이 모은 것이 아까워 이웃을 위해 자선도 한 적이 없구나. 비렁뱅이로 사는 이들을 보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욕이나 해댔다. 그 사람 안의 고통을 바라볼 줄 몰랐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사람을 선하게 대하여라.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두 평등하다는 말은 수평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내 가슴에는 멍이 많다. 이제 생각하니 분하다고 하는 것은 억울하고 분한 것이 아니라 모르고 살아 온 것들의 잘못을 말한다. 깨달음을 거울삼아 제대로 한 번 살아보려니 갈 길이 바쁘구나. 저기 하늘에서 빛이 보인다. 너도 네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너를 잘 보듬어 주어라. 너는 후회 없이 살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아가.

 

어머님, 저도 할 말이 많아요.

최영 장군의 후손이며 뼈대 있는 가문에 시집온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천주님을 믿고 사는 집안이라서 제게는 축복이었지요. 신앙이 같은 사람끼리 산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지요. 저의 가문도 만만치 않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니까요. 친정어머니도 사위 될 사람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에 흡족했답니다. 어머님을 처음 뵙던 날이었지요. 식사하면서 성호 긋는 제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잖아요. 십자성호로 우리는 인연이고 꼭 만나야 할 사이였던 것 같아요.

 

저는 가난이 싫어서 부잣집에 시집가리라 꿈꾸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짝을 만나리라 벼르며 나의 망상은 시끌벅적 끝이 없었지요. 어머님의 살가운 일곱째는 멋진 남자였고 저에게 세상 좋은 것은 다 해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같았어요. 화려한 미끼를 덥석 물고 낚싯대에 낚였지요. 망상에 빠져 살았으니 사리 분별이 없음은 당연한 이치였답니다. 겉치레에 콩깍지가 씌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부잣집 아들에다가, 사업을 하고 있었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팔 남매의 일곱째 아들이라 더더욱 날개를 달았지요. 어머님, 사실은 비둘기 둥지 같은 곳에서 저희 둘만 사는 줄 알았답니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현실은 냉엄했어요. 다른 형제들은 다 출가하여 나가고 시동생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시댁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싫다 하지 못하고 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갔으니 어리석었지요. 어머님 당신은 호랑이같이 무서웠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살림도 할 줄 모르는 얼뜨기가 그 굴에서 삼십 년을 살았지요. 이제야 말하지만, 그동안 흘린 눈물은 잴 수가 없고 속으로 삼킨 울음만도 한 드럼은 될 거예요.

시집살이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도 잘 아시잖아요. 고생 모르고 살아온 당신의 아들은 씀씀이가 헤펐지요. 아버님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하셨잖아요. 좋은 옷을 입었고 맛난 음식만 먹으면서 뭐든지 최고만 하고 살았던 일 다 기억하시지요. 어머님은 언제나 아들 편만 들었잖아요. 성씨가 높을 최(崔) 씨라 그렇다고 했지요. 뻔쩍뻔쩍한 야마하 오토바이를 타면서 천지를 모르고 까불다가 결국 쪽박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요.

어머님, 저도 마음고생을 꽤 했습니다. 잘난 시댁과 잘난 남편에게 눌려 기죽고 풀 죽어 살았지요.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몸도 마음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제 일상이 편안해 보였겠지요. 물 위에 뜬 백조는 아름답지만, 물속에서 갈퀴를 바쁘게 움직여야 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긴장의 연속은 연하고 부드러운 저의 속성까지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은 현실에 순응하는 생존 법칙이었겠지요. 현실은 고까웠지만, 스스로 단련시켰답니다. 마치 대장간에서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찬물에 담그고 또 달구기를 반복하며 담금질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어요.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면 ‘찌직’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참았다니까요.

참고 살아온 수십 년이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혼쭐도 나고 지청구 들으며 야물고 다져졌지요. 일 못 하는 며느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어머님의 꾸짖음은 서럽고 야속하기까지 했다니까요. 소고깃국을 끓이면서 “파는 몇 센티로 썰어야 할까요?”, “물은 몇 컵을 넣고 끓일까요?” 이 정도였으니 답답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지요. 여자가 신경 써야 할 이불 홑청 푸새도 잘 하지 못했잖아요. 눈치채셨지요. 땅이 꺼질 듯 내쉬는 어머님의 한숨 소리가 들리면 오금이 저려 하던 일도 덤벙거렸습니다. 쏟고, 깨고, 태우고. 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시집을 왔느냐면서 노골적으로 친정어머니 원망까지 하셨잖아요.

그래도 어찌하겠습니까? 눈물을 달고서도 “죄송해요, 다음엔 잘하겠어요.” 하면서 애교를 떨었지요. 어머님 기억나십니까? 살살 웃고 살았더니 노여움도 타지 않는다면서 모자란다는 소리까지 하셨잖아요. 어머님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정신도, 육체도 고단하게 살았어요.

어머님 한 가지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미국에서 시누이가 친정에 다니러 왔을 때 저더러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열라고 하셨잖아요. 연탄가스 냄새가 난다면서 저를 먼저 떠밀었어요. 그때 속상했어요. 나도 우리 엄마한테는 귀한 딸인데 당신 딸만 귀할까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그때 나이 많은 내가 먼저 들어가야겠다고 하셨다면 제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멀리서 온 손님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이해했지요. 그러나 아직 그 응어리가 남아있어요. 저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답니다. 일일이 말을 다 할 수 없지만, 삼십 년 동안 어머님 모시고 살면서 비 오고, 눈 오고, 바람 불던 날 무수히 많았지요. 고초 당초 시집살이 서러움은 간곳없고 지금은 아련한 그리움만 남았어요.

친정에서 자란 햇수보다 어머님과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잖아요. 타박도, 투정도 조금씩 도타운 정으로 이어졌지요. 어느 날부터 제가 어머님을 엄마로 불렀잖아요. 고부간이 아니라 모녀가 된 것이지요. “네가 천심이구나.” 하는 소리를 듣던 날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딸처럼 생각하시고 사랑하는 마음 다 알기에 제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겁니다.

 

어머님, 당신의 손자가 스무 명이 넘지만, 손수 키우신 우리 아이들을 특별히 귀히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함께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도록 살았네요. 긴 세월이라지만, 짧은 순간이 지나간 듯합니다. 원망이나 미운 감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잘못한 것들이 꾸역꾸역 기억 바깥으로 기어 나옵니다.

사람들이 호상이라고 하네요. 증손자가 수두룩 셀 수도 없군요. 복 받으셨어요. 자식들도 마음 아파 우는 사람이 없어요. 잘 사셨다는 말만 하고 있어요. 어머님의 귀한 남동생, ‘김해 허씨’ 가문에 대를 이었던 연로하신 외삼촌이 휠체어를 타고 오셨네요. 자손들이 교수가 되고 은행지점장도 되고 번창했습니다. “우리 누님, 우리 누님” 하면서 어깨 들썩이며 눈물 흘립니다. 머지않아 외삼촌도 어머님 곁으로 가시게 되겠지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요. 좋은 날 좋은 시에 떠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렇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서 보속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 기억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자식들은 내 마음 다 모른다.”고 하면서 저더러 외롭게 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는 충격 받았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마흔다섯 해를 혼자 지내셨더군요. 혼자 사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저희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자식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과부가 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별생각을 다 했지요. 어머님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떻게 그 말씀을 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합니까? 저도 먼 훗날 이런 말을 할까 걱정됩니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함께 살면서 좋았던 기억만 남았네요. 저도 시어미가 되었으니 어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머님만큼만 살면 흉잡히지 않고 살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 계셨는데 나 혼자 생각으로 섭섭했고, 무서워했다는 것 이제 알아요. 어머님은 인자하셨고, 제가 늘 부족했으니까요. 천국에 드시면 사랑하는 아들, 일곱째가 마중 나올 겁니다. 모자 상봉하시거든 제 얘기도 좀 해주세요. 잘 살더라고요. 어머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도 어머님처럼 며느리를 아끼겠습니다.

 

어머님, 당신의 일생을 대하소설로 탄생시키고 싶은데 며느리의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영정 앞에서 당신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씩씩하게 여장부로 살아오신 나이테의 두께를 허공에 날리면서 하얀 나래 고깔 쓰고 마음의 고향, 영혼의 고향으로 귀천하소서.

 

어머님과 살아온 세월의 정담을 나누다 보니 밤을 지새웠나 보다. 어머님으로부터 삼십 년간 들어온 이야기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녹음테이프 돌듯이 돌고 돌았다. 우리 세대 모든 어머니의 이름이 ‘분이’일지 모른다. 아침이면 분이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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