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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에세이향기 2022. 2. 7. 10:00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학기말이 되면 자신의 학점이 생각했던 것보다 덜 나왔다고 문의하는 학생이 간혹 있다. 학생의 짐작이 맞다. 특히 주관식 서술형이 아닌 외국어의 경우는 시험 본 당사자의 채점이 어지간히 맞아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딴 사람들이 시험을 잘 보면 본인의 점수가 내려가고, 딴 사람들이 시험을 못 보면 본인의 점수가 올라간다'는 상대평가의 성적 산출 근거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난 학생은 체념이 빠르고도 명료하다. 그럴 적마다 마음이 우울한 건 오히려 내 편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상대적 경쟁의 터널을 지나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상대평가라는 잣대는 그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핸드폰의 존재만큼이나 친숙하고도 당연한 것 같다. 나의 능력, 나의 노력대로가 아니라 옆 사람의 그것에 따라, 상황의 우연성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하는 부조리와 그토록 친숙하게 된 학생들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영국의 힐러리라는 등산 가는 네팔의 셀퍼 출신 텐징과 정상까지 동행했는데 둘 중에 누가 최고봉의 바위에 한 쪽 발을 먼저 올려놓았는지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다. 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영국의 힐러리를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자라고 보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텐징이 자신이 힐러리보다 한 발 먼저 정상의 바위를 밟았다고 주장해서 국제적 분쟁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등산가가 아닌 나의 눈에는 한 발을 먼저 정상의 바위에 올려놓은 사실이 등산가의 능력을 판가름할 만한 척도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라와 나라가 그 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릴 만큼 매달렸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본질이 아닌 것에 집착하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밖에서 찾으려는 집요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일등을 뽑아내려고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제비뽑기의 일등이건 심지어는 능력의 순서가 뒤바뀐 오류의 일등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일등에게 주어지는 조건 없는 이 열광적인 갈채가 없다면 사람들은 일등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토록 온몸을 던져 질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상의 본질보다는 상대평가의 눈금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대중의 취향은 영웅을 선택할 때보다 악인을 낙인찍을 때 더 두드러진다.

건국이래 가장 참혹한 사고였던 삼풍백화점 붕괴 때였다. 연일 사망자의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세상은 온통 분노와 슬픔으로 호흡을 고르지 못하던 때였다. 응징의 대상은 물론 백화점의 소유주였다. TV에서는 여론을 반영하는 특별간담회가 열렸다. 사고를 바라보는 대담자들의 시각은 거의 같았다. 인명보다 돈을 택한 파렴치요, 부도덕이라고 질타했다.

그런데 출연자 중에 끼어있던 작가 한 분의 말은 달랐다. "매일매일의 매상고 4억이라는 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현실이고, 건물의 하자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사고는 하나의 개연성이었다. 나라면 과연 그날 4억을 포기하고 백화점 문을 닫았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어느 쪽을 택했을지 자신이 없다." 분노한 세인들이 백화점 주인에게 던지던 돌을 이 작가에게 던지지나 않을까 두려울 만큼 분위기로 보아 그의 말은 파격이었다. 더구나 그 사고에 가족이 희생된 유가족에겐 천부당만부당한 궤변이었을 것이다.

그 작가의 이 굴절 없는 자조(自照)의 언어는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을 향해서 '누구든 죄 없는 자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고 한 성경구절을 연상케 했다. 돌 맞는 여인보다 자신의 행실이 조금 낫다고 자부하며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에게, 성경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대평가를 허용하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기 평가는 절대평가이지 상대평가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자 앞에 모두가 오직 죄인일 따름이다. 흉악한 자 옆에 악한 자가 있으면 악한 자가 제법 괜찮아 보인다는 셰익스피어의 말마따나 인간에 대한 상대평가라는 것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된다.

내가 TV에 나왔던 그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장 열렬한 독자는, 그리고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독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만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평가해 주는 독자가 있다면, 비록 호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순결한 문학정신을 접하면서 나는 늦게나마 문학도가 된 것을 퍽 행복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정확'이라는 과녁은 과연 어디일까. 그 작가의 정신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화살의 방향을 어찌 나의 눈이 가늠할 수 있을까만은 짐작컨대 그것은 옆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얼마나 나은지 못한지를 가려내는 위상(位相)의 정확성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향해 가고 있는 '존재의 세계'는 옆 사람과 경쟁해서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잖은가. 그 길은 옆 사람을 의식할 것 없이 혼자서 걸어야 하는 외나무길이다. 우리는 영원히 그 곳에 이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리로 향해 인식의 불꽃을 태워야 하는 하릴없는 시지프의 후예들이다. 그 길 말고는 진리를 향한 지름길을 알지 못한다.

진리 앞에 서면 티끌보다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 이것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평가의 잣대이다. 옆 사람의 진리를 향한 성적표에 따라 나의 점수가 오르락내리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작가의 '정확한 자기 평가'라는 것도 그래서 절대평가의 잣대이지 상대평가의 잣대는 아닐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번 학기에도 자신의 시험지를 가장 정확하게 절대평가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나는 또다시 상대평가의 점수를 내줄 수밖에 없다. 만일 이번에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점수가 덜 나왔다고 문의하는 학생이 있으면 나는 또 다시 상대평가의 허구성이 아니라 짐짓 그 합리성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생각과 말이 달라야 할 일이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점수가 너무 잘 나왔다고 신고한 학생은 아직 없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한 학생들은 있었을 것이다. 점수가 덜 나왔다고 문의한 학생에게나 똑같이 나는 이런 학생들에게도 평가를 잘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 학생들에게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호도하려는 의도는 내게 없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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