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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에세이향기 2022. 2. 25. 19:44

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부엌 안에 하수구가 없던 시절 엄마의 설거지는 복잡했다. 먼저 밥솥 안에 두 바가지 정도의 물을 붓는다.

숭늉을 긁어 냈으므로 밥 찌꺼기가 남아 있지는 않은 솥이다. 거기다 식사한 그릇들을 거두어 담는다. 나물 접시,

국그릇, 된장찌개 냄비도 거기 들어간다.한 번씩 헹궈낸다.그릇에 묻은 곡기와 간(엄마는 소금기를 '간'이라 불렀다)은 물에 말끔히 헹궈진다. 솥 안의 물은 금방 뿌옇거나 누레진다.

이 물을 다시 바가지로 퍼낸다. 퍼낸 물이 더럽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땅에서 나온 곡식기운이 뿌옇게 담겼으니 소중하고 아까울 뿐이다. 이 물은 부엌 뒷문 앞에 놓인 항아리에 조심스레 부어진다. 이건 집에서 기르는 짐승의

밥이다.개가 먹을 때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소죽 끓일 재료로 쓰인다. 개에게는 이런 고급 음료(?)가 배당되지

않는다. 예쁘게 굴면 소죽 물통에 입을 대고 곡기 우러난 물을 핥아먹어도 용서가 되지만 텃밭 울타리라도 망가뜨린 날이면 쇠죽물통에 얼씬하다가는 등짝에 고무신짝이 내려쳐지는 징벌을 당한다. (우리 동네서는 부엌 앞에 놓인 그 개숫물 항아리를 쇠죽물통이라고 불렀다. 첨엔 무거운 옹기였다가 나중 가벼운 양은이 생긴 후 양은 양동이로

바뀌었다가 더 나중 플라스틱과 고무그릇이 흔해 진 후 검자줏빛 고무그릇으로 쇠죽물통의 역사는 변했다.

그러나 엄마의 설거지 공식은 그릇 재질이 뭐든 한결같았다).

 

첫 번째 물을 퍼낸 다음엔 다시 세 바가지의 새 물을 붓는다. 거기 그릇을 한 번 더 헹군다. 헹궈낸 물은 아까보다는 맑다. 그러나 하늘이 되비칠 만큼 투명하지는 않다. 이건 또 다른 용도가 있다. 두 번째 개숫물은 소죽물통 곁의

작은 항아리에 퍼 담겨 채마밭에 뿌려지거나 개에게 줬다. 설거지한 물을 얻어 먹어야 방앗간 곁에 심어놓은 파나

열무의 이파리가 제대로 윤이 났다. 생명 있는 놈들은 다들 곡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단, 걸어 다니는 놈은 간기까지 좋아하나 걷지 못하는 생명은 소금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첫 번째 설거지물을 채마 밭에 뿌려서는 안 된다고 엄마는 말했다.

 

며칠 전 '아단문고'의 '허영휘' 선생 집에 잠깐 들렀다. 그는 궁중요리를 배워 들깨강정을 직접 만들고 봄날

'지곡서당' 근처에 한창 쑥이 돋으면 그걸 뜯어 얼려뒀다 1년 내 쑥떡을 해먹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 집(가회동 옥선관) 옥상에는 화분에 심은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고추는 주렁주렁 장하고 실하게 열려 붉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고추나무가 웬만한 감나무만은 했다. 비결을 물었더니 매일 아침 쌀 씻은 물과 우유팩 헹군

물을 고추에 부어준다는 것이다. 저녁에 발 씻은 물도 버리지 않고 화분에 붓는다는 거였다. 그도 우리 엄마 같은

엄마를 가졌음이 분명했다. 다른게 있다면 그는 자기 엄마가 하던대로 따라 행동하는 실팍한 학자이고 나는 엄마가 하는 걸 맨날 머릿속에 영사해 볼 뿐 몸으로 옮기지는 않는 '날라리'라는 점이겠다.

 

두 번째 설거지로 그릇에 묻은 찌꺼기는 모조리 없어진다. 다시 솥에 세 바가지의 물을 붓는다. 그릇을 한 번 더

헹구고 그 물을 퍼내 행주를 빤다. 행주 빤 물을 버리냐고? 역시 천만의 말씀이다. 그냥 버리면 저승에 가서 그 물을 다 마셔야 한다는 '법'을 엄마는 진짜 법으로 굳게 믿었다. 그 물에다가는 방, 마루를 닦은 걸레를 빤다.

걸레를 빨아 한참 컴컴해진 후에도 그 물은 수채구덩이로 바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거름더미에 펄쩍 쏟아라"고 엄마가 말한다. 내가 엄마를 조금이라도 도운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나는 대야에 담긴 걸레 빤 물을 들고 대문을 열고 사랑마당으로 나가서 거름더미 위에 거름기운이 듬뿍 든 물

(방,마루에 묻었던 떄구정물이 다시 거름이 된다.타고 남은 재가 다시 거름이 되듯!)을 엄마 말대로 펄쩍 쏟아

붓는다. 발꿈치를 높이 들고, 새 신을 신고 뛰듯 펄쩍!

 

거름더미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네 번째 물을 솥에 다시 붓고 있다. 그릇을 한 번 더 헹구고 걸레를 한 번 더 빨고

이번엔 그 물을 마당이나 뒤란에 살살 뿌린다. 그래야 마당 쓸 때 나는 흙먼지를 죽이고 마당귀에 사는 안 보이는

생명까지 먹여 살릴 수가 있으니까. 하수도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있었다 해도 천금 같은 물을 그리로 흘려보낼 순

없었으리라. 그리고 행주로 솥 안을 말끔히 싹싹 닦고 부뚜막도 물기 없이 닦아내고 아궁이의 재를 여며 덮고 재가 바람에 날지 않게 기왓장으로 아궁이를 막는다.여기까지가 엄마의 설거지의 전 과정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허리를 족히 2,3백번은 굽혔다 폈다 했으며 개숫물 담긴 바가지를 들고 무릎 높이 문턱을 족히 스무 남은 번 넘나들었다.

아이고 허리야를 후렴처럼 반복했지만 단 한 과정도 생략하지는 않았다.

 

여러 십년이 지나 나도 어른이 되었다. 내 부엌에서 내 설거지를 하는 날이 왔다.

다행히 그동안 세상이 놀랍게 달라졌다. 부엌 안에 상하수도는 물론 전기와 가스가 다 들어왔다. 손만 대면 물이

철철 흘렀다. 수도보다 더 신기한 건 버리는 물이 귀신같이 어디론가 빠져 나간다는 점이었다. 물 버리기가 너무나 쉬워졌다. 설거지 방식도 간편해졌다. 일단 빈그릇을 쓸어 담는 건 그게 솥이건 싱크볼이건 엄마와 다를바 없다.

내겐 쇠죽물통 같은 건 준비돼 있지 않다. 짐승을 기르지도 않는다. 그러니 구정물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건

공히 인정해 주시라!

 

수세미에 일단 부엌용 세재를 듬뿍 묻힌다. 거품이 많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아무래도 세척력이 우수할 테니 아낌없이 묻힌다. 수돗물을 튼다. 준비된 하인처럼 물은 금방 콸콸 손등으로 쏟아 부어진다. 거기다 북적북적 수세미질을 한다. 수세미질을 하는 동안도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흘러 망설임 없이 하수도로 빠져 내려간다. 한 번도 자세를 바꿀 필요가 없다. 그냥 제자리에 서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기적이다.

다음 비누 묻은 그릇을 헹군다. 비누를 묻혔으니 오래오래 충분히 헹굴 수 밖에 없다. 담아먹을 수는 없지 않나.

대신 손놀림은 초조하고 빠르다. 내 무의식은 흐르는 수돗물을 분명 아까워하고 있다.

 

죽으면 헤프게 쓴 허드렛물을 다 마셔야 한다는 엄마의 "법"이 아직 눈 벌겋게 뜨고 내 안 어딘가에 살아 있나

보다. 그래서 수돗물 아래 설거지하는 손놀림은 늘 허둥지둥 바쁘다. '부적절한'일을 남몰래 치르듯 모종의 켕기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상하수도가 완비된 부엌에서 지금 편리하게 설거지를 하는 나는 과연 문명인인가? 땅에서 나는 곡식을 외경할 줄 모르는 생명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게 확실하다. 혹시 엄마보다 내가 더 무지몽매한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지금 딜레마에 빠졌다. 엄마처럼 개숫물을 일일이 바깥에 모아두는 설거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 원시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면? 아찔할 뿐이다. 무슨 수로?

오, 노우!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부족은 예상보다 심각한 것 같다. 맘대로 수돗물을 틀지 못하는 날이 머잖아 닥칠지도 모른다.

설거지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나는 저승에서 수십톤의 물을 마셔야 할른지도 모른다. 엄마? 엄마야 물론 억지로

마셔야 할 물 같은 건 1리터도 안되겠지. 그러나 생전의 행동으로 보자면 엄마는 거기서도 내 몫의 하숫물을 대신

마시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다. ....아아, 큰일났다!! 엄마 때문에라도 세제를 쓰지 말고,

통에 물을 받아놓고 하는 설거지를 시작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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