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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에세이향기 2022. 2. 24. 17:24
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술조사라는 것이 있었다.

술조사는 대개 세무서 직원이 맡았는데 그들이 오면 할머니는 누룩자루를 들고 다락으로 숨으셨다.
밀주빚기가 그처럼 범법이 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집에서 가양주 한 두종류쯤 담글 줄 아는 것이 되려 범절있는 집안으로 환호받는다. 술빚기는 똑같이 쌀을 재료로 하는 일이지만 밥이나 떡과는 다르다. 뭔지 들뜨고 흥청거리고 비일상적 설렘이 있다. 누룩이란 말 자체의 은밀함, 노을 아래 술익는 마을이란 도가적 서정, 아랫목에 묻어둔 술항아리의 추억들이 뒤얽혀 술빚는 행위에 모종의 문화적 아우라를 형성한다. 누룩냄새를 맡고 싶었다. 술항아리에 귀대고 아득하게 괴어오르는 소리에 집중하던 순간이 그리웠다. 양조장은 사양산업이긴 하지만  면단위로 내려가면 아직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옛날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는 곳은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전통제주법  대신 옥수수 전분과 물을 섞어 끓인 뒤 아밀라제를 첨가한 당화주를 만드는 편이 빠르고 간편하고 비용이 적게 드니까. 대량생산하는 제조업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듯  양조업계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듯하다. 


 그러던 차에 덕산양조장 소문을 들었다.
진천군 덕산면에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양조장이 있는데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고 철저히 전통 제주법을 고집한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새벽에 일어나  덕산으로 달렸다. 새벽에 출발한 건 술 담글 원재료인 고두밥을 아침 7시부터 찌기 시작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 옛날의 고두밥을 한 줌만 얻어먹고 싶었다.  


  덕산양조장은 양조장 건물의 전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백두산 전나무를 압록강 제재소에서 켜서 수로로 날라 기초와 벽을 쌓았고 겉엔 검은 옻칠을 했다. 전엔 압록강 제재소의 압鴨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나 나중 페인트 칠을 하면서 지워졌다 한다. 건축연도는 1930년. 출입구 양쪽에 대여섯 그루심은 측백나무가 80년 가까이 자라 술도가다운 그립고 그윽한 풍경을 이룬다.
 입구에 들어서자 대번에 양조장 특유의 달큰하게 익어가는 술냄새가 풍겼다. 무슨 축제같은 향기였다. 맨먼저 눈에 띠는 종국실. <국>은 아마도 이규보가 국麴선생전을 쓸 때의 그  국자일 것이다. 누룩을 어떻게 만드는 지가 실은 가장 궁금했다. 전에는 밀을 갈아 메주처럼 발효시켜 누룩을 만들었지만 현대의 양조장은 과연 어떤 방법을 쓸까.


 먼저 멥쌀(밀가루를 쓰기도 한다)을 갈아 일정 분량의 종국(누룩곰팡이균. 곰팡이는 따로 만들어 파는 곳이 있다)을 섞어 버무린다. 버무려서 일정한 습도를 주기 위해 젖은 헝겊으로 싸뒀다가 하루 뒤 풀어서 뭉치지 않게 골고루 비벼준다. 발효된 쌀가루를 곱게 비벼 누룩상자에 담고 23℃가 유지되는 종국실에서 2일간 배양시킨다. 이때 배양그릇을 엇갈리게 놓기도 하고 차곡차곡 쌓기도 하고 가루위에 손가락을 골을 치기도 하면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놓는 방식과 골의 숫자가  달라지는데 그게 바로 종국실의 노하우다.사람 손과 눈과 피부와 코가 가장 민감하고 정확도 높은 센서라 거기 맞춰 조절한다. 그걸 정확히 감지할 줄 알려면 종국실 밥  5년은 먹어야 한다. 


덕산 양조장 벽과 기둥은 온통 꺼뭇꺼뭇하다. 이건 때도 아니고 먼지도 아니다. 깨끗한 게 좋다고 닦아내면 큰일난다. 그게 바로 술 만드는 누룩곰팡이균이다. 곰팡이는 흑균이 있고 백균이 있다는 걸 나는 처음 배운다. 그 균이 쌀에 들어가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다시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단다.


 지금  이집 주인은 원래 건설업을 하다  IMF때 부친의 양조장을 맡았다는 이규행 사장, 체격좋고 인물좋고 말잘하고 통크고 부지런하다. 그가 풀어놓는 술에 관한 얘기는 듣는 사람 가슴까지 뜨겁게 달군다.   1929년 창업 당시 조부는 덕산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주로 생산했고 1961년 가업을 이은  부친은(원래 직업이 수의사셨다) 약주를 전문으로 만들었다. 이제 3대 이규행 사장은 선대가 일구어놓은 덕산 약주의 ‘비결(秘訣)’을 재차 증류하고 발효하는 중이다. “술 마신 다음 날 머리가 아픈 건 술 만드는 사람이 정직하게 않아서예요. 술 마시기 전엔 반드시 술병을 흔들어보세요. 거품이 오래가는 술이 진짜 약주입니다. ” 덕산약주병을 들고 마구 흔들어 거품을 만들면서 그가 짓는 득의연한 표정. 열정과 꿈과 의지를 다 바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자랑스러움이 거기 있다.


 이전에는 곡식과 누룩으로 빚은 술이 20도를 넘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이었다.
“ 약주는 알콜 도수가 대개 17~8도에 그쳐요. 내가 양조장을 맡으면서  20도가 넘는 술을 한번 만들어보자 싶었죠,” 그래서 지난 10년간 거기 매달렸다. 벼라별 시도를 다했다. 마침내 지난해 그는 22.8도짜리 약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결? 알콜 도수를 높인  비결을 그는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 효모균의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에다 적용시켰어요. 효모균 발효 단계서부터 좋고 나쁜 극단의 환경을 만들어줬죠. 균들을 일부러 죽지않을 만큼 고생도 시키고. 그랬더니 도태될 놈은 도태되고 살아남은 놈들만 살아남데요. 적자생존이죠. 근데 악착같이 살아남은 놈들에게서 높은 도수가 나오던데요?”


 생산과 기획 담당인 이규행 사장이 영업과 총괄 담당인 부인 송향주씨와 함께 꾸리는 덕산양조장은 이제 진천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소중한 역사문화공간이다. 발효실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술독들이 수십개 늘어놓였는데 거기 술독마다 1932년 용몽제(龍夢製)’라고 새겨져 있다. 사인이 들어간 독은 첨 본다. 이 마을 이름이 용몽리다.  용꿈을 꾸고 낳은 아들에게 몽룡이란 이름을 붙이는 건 알겠는데 동리 이름이 용몽이라면 꿈 속에 용을 보고 이 동네에 터를 잡았다는 소릴까.
 “황토는 뭐니뭐니해도 덕산 꺼를 최고로 알아주지요. 덕산 중에서도  용몽리 게 젤 낫다고 해요. 오죽하믄 시집올 때 고무신에 묻은 흙이 죽을 때꺼정 안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라고요” 그의 구수한 입담에 매료된 체 나는  단층 합각 함석 지붕 대들보에서 그 옛날의 상량문을 읽는다. ‘소화 5년 경오 구월 초이일 미시 상량 목수 성조운’,


  덕산 양조장 건물은 옻칠한 전나무로 외벽을 두른 후 대나무와 칡넝쿨로 뼈대를 엮어  짚과 황토를  차지게 으깨어 속을 채웠다.  발효실과 주모실의 옹벽은 두께만 자그마치 90cm,! 외기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완벽하게 단열이 된다. 벽 속은  왕겨로 가득 차 있고 발효실 천장에도 왕겨가 수북하다. 천정에 난 작은 창을 여닫아 온도를 조절하는데 70년 넘은 지금도 도드레가 매끄럽기가 방금 기름바른 듯하다. “얼마 전 문화재청에서 건물 보수를 할 때 보니까  저 작은 미닫이 창문으로  바닥의 먼지들이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올라가데요. 술 공장으로서 이곳만큼 과학적인 설계 시공을 한 데는 전국 어디서도 찾기 힘들 걸요” 
 고두밥 찌는 솥은 1톤짜리다. 기름값이 오를 걸 미리 예견해 찜통은 몇해 전 심야전기로 바꿨다. 하루 일톤은 아니라도 700킬로 정도는 밥을 찐다. 양조장이 꽤 잘 된다는 소리다. 열두병들이 약주와 스물네병들이 막걸리가 심심찮게 팔려나간다. 청주까지, 대전까지 멀리는 양재동 하나로 마트에도 덕산 양조장 술이 들어간다.


 이 양조장은 쌀도 갓 도정한 것만 쓴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씻고 젓고 비비고 짠다. 수공업적인 가치가 기계생산의 가치보다 백번 우월하다는 것을 사장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가  최근 새롭게 개발한 품목은 흑미와인이다. 무농약 흑미를 쪄서 흑미와인을 발효하는데 맛이 와인과 희한하게 닮았고 빛깔도 딱 와인빛이다.  와인전문가를 모아놓은 주류 품평회에서 호평도 받았다.


  “ 이게 바로 주모예요.
누룩 400g과 물 130L를 섞어 밑술(주모)을 잡거든요. 
밑술을 안친 술독은 23℃∼25℃ 되는 실내에서 2일간 발효시키고  술독의 품이 30℃로 항상 일정하도록 온도 조절을 해줘야 해요. 1차 발효가 끝난 후 다시 고두밥을 넣어 덧술을 안칩니다. 이때  12가지 한약재를 같이 넣어요. 그런 후  10일이 지나면 술이 익어요. 익은 술은 기계로 눌러서 짜면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우린 술을 억지로 짜지 않아요. 괴롭히지 말고 예전 방식대로 명주자루에 넣어서 자연낙차를 이용해서  짜야 술맛이 깊어요” 이사장의 술에 대한 설명은 2박 3일이 흘러도 끝나지 않을듯 한데 한 두잔 마신 술이 벌써 알딸딸하게 취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