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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바람을 먹는 돌 / 김정화

에세이향기 2022. 3. 1. 10:32

바람을 먹는 돌 / 김정화
 
 
마을로 들어선다. 구릉에 우뚝, 그들이 줄지어 있다. 바람을 맞은 검은 나신들이 하늘을 떠받든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부동의 자세가 숭고하다 못해 신령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이 석상들을 만나고자 무던히도 많은 돌을 지나왔다. 조심스레 그들 곁에 다가선다. 서 있는 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인디언처럼 단단한 어깨와 구도자의 평온한 등이 보인다. 묵묵히 눈을 감고 있거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석(老石)도 있다. 얼굴 또한 여유롭고 신비롭다. 각각의 표정과 몸짓이 다르고 햇살 따라 낯빛이 변하기도 한다. 강물을 닮은 논매와 노을빛 미소가 지긋이 나를 내려다본다. 움푹 들어간 눈자위에 빗물 고인 석상은 눈물을 담은 듯 슬퍼 보이고 하얀 돌단풍을 피워 올린 머릿돌은 의관을 갖춘 신관마냥 굳고 위엄이 넘친다.
그들은 오직 바람만 먹고 산다. 바람을 막는 돌은 매끄러운 살결처럼 반들거리지만 바람을 먹는 돌은 곰보딱지같이 빠끔빠끔 구멍이 뚫려있다. 더군다나 속돌까지 새까맣게 그을렸다. 그 자태로 돌은 숨을 쉰다. 이러한 돌에 귀 기울이면 태왁을 안은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가 들리고 도리깨질 하는 어멍의 한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 제주 돌이 전하는 이야기가 이것인 듯하다.
돌이 사람을 기다리는 곳이 제주이다. 돌하르방부터 다듬지 않은 막돌까지 지천의 돌이 길손을 맞는다. 동네 어귀에 방사탑이 솟고 초집 문에는 정낭과 정주석이 버티고 섰으며 마을마다 울담이 그물처럼 긴 줄을 잇고 있다. 나는 이곳 돌마을에 와서야 사람들의 믿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언제나 돌에 마음을 기대었다. 살아서는 석장승이나 돌벅수를 의지했으며 죽어서는 고인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돌무덤을 만들고 선돌의 호위를 받으며 동자석에게는 영혼의 시중을 들게 했다. 때로는 무덤가에 천년 돌담을 쌓아 이승과 저승을 인연의 끈으로 묶는다.
모서리가 파인 몸돌 하나 올려다본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등에 인 석상의 부동선 사이로 길게 바람이 흐른다. 주변 풀숲의 잎사귀들은 아직도 빗물을 털어내기에 숨이 차건만 석상들은 비바람조차 품어 안는다. 홰치는 외풍에 흔들리거나 무너지기보다는 몸을 내밀어 모조리 껴안는다. 그 신비로운 교감이 섬사람들을 이 땅에 남게 하는 힘이 된다.
단단한 돌 앞에 서면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일. 사람들은 흔히 돌이 침묵을 지킨다고 한다. 그 말을 뒤집어 생각해본다. 침묵한다는 것은 말할 사연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석상은…. 순간 번쩍 정신이 든다. 그동안 나는 돌 앞에서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 냈던가. 마당에 있는 작은 졸부터 골목의 모퉁이 돌, 공원의 반지레한 돌과 강변에 있는 평평하고 넓적한 돌까지…. 하지만 누가 내 말에 이처럼 귀 기울여 준 적 있었던가. 묵묵히 내 푸념을 들어주기만 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돌의 묵언에 고개가 숙여졌다.
석상이 긴 잠을 자고 있다. 아니, 명상 중이다. 이스터 성의 모아이 상 같기도 하고 스톤헨지의 거석이 떠오르기도 한다. 생로병사를 뛰어넘고 희비애락을 건너뛰는 곳, 남녀노소가 있지만 더 이상 늙지 않는 곳, 이곳에 오면 버린 돌도 굄돌이 되고 구르는 돌도 제자리를 찾는다. 사람도 혼탁한 마음을 다독이면 몰아일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깝신거리고 나부대는 인간들의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움쩍 않는 돌. 사람이 잠잠하면 돌들이 입을 열까.
나는 이 석상들을 어루만지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본다.
“소리치는 돌, 웃는 돌, 술렁이는 돌, 부르짖는 돌, 춤추는 돌, 노래하는 돌, 그리고 바람을 먹는 돌….”
그러고 보니 바람을 먹는 돌이 가장 경외스럽다. 그 돌이 진정한 인고의 돌이다. 세월의 자취는 인간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돌의 문양처럼 저절로 남겨지는 것이니까. 돌 사이를 천천히 걸어 본다. 홀로 걷고 걷다 보면 침묵의 돌들도 슬며시 말을 걸어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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