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요양사 / 손준호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시큰시큰 쇳내 나는 이름. 종신보험같이 오래된 그림자만 몇 차례 뙤똥뙤똥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늙은 나무라고 늙은 꽃을 피우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해요. 저녁이면 손끝에 경련이 일어요. 쇠줄 묶인 백구가 등 휘도록 텅텅 적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발치 /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 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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