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척단구 / 이희승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아마 대인과 소인으로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또 대인이든지 소인이든지 이것을 각각 두 가지로 다시 나눈다면, 인간개체에 육체와 심령이 있고, 인생 생활에 물심양면(物心兩面)이 있으며, 대우주 자체에 물질면과 정신면이 있듯이, 대인에도 정신적인 대인이 있을 것이요, 소인에도 또한 마찬가질 것이다.
그런데, 소인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육체적인 것에 대하여는 별로 주석이 없으며, 오직 정신적인 소인에 대하여서만,
(1)세민(細民)
(2)불초(不肖)한 사람
(3)스스로 겸손하는 말(自謙之詞)
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세민이라 함은 빈천한 사람을 의미하고, 불초한 사람이라 함은 학덕(學德)이 없고 성질이 사악한 사람을 가리킴이요, 셋째로는 상대자를 존경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어서 ‘소인’이라 일컫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 때 사람 이수광의 <지봉유설>제16권 ‘해학’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난장이(短小者)가 비대한 사람을 비웃는 말이,
말을 타니 다리가 땅에 끌리고,
방으로 들어가다 이마부터 부딪는도다.
배꼽에 불을 겨면 양초 대신이 될 것이요.
다리는 잘라서 사앗대를 삼을 만하도다.
이번에는 비대한 사람이 난장이를 비웃는 말이,
갓을 쓰니 발이 보이지 않고,
신을 신으면 정수리까지 들어가고 마는도다.
길을 가다 쇠발자국 물만 보아도,
겨자씨 껍질로 배를 삼아 건느려는도다.
여기서 대인이니 소인이니 하는 것은 정신면이 아니라, 온전히 육체를 가지고 한 말이다.
그러면 대인과 소인은 육체면과 정신면에 있어서 정비례하느냐 반비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절충이 되느냐, 어느 한 가시 경우라고만은 우겨낼 수가 없다. 육체의 대소와 정신의 대소와의 관계는 매우 착찹하여 이 세 가지 경우가 다 있을 것이요, 이 밖의 경우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 사실에서만 보더라도 절대 무차별 평등이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요, 형형색색, 다종다양한 것이 인생이나 우주의 실태인 듯싶다.
이 다양 다채성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인지, 필자는 가장 단소한 체구를 타고 났다. 이 사실을 필자에게 비극이 되는 일도 있고, 희극이 되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희비 교차의 혼성극이 되는 일도 있다.
어떤 친구는 이수광 볼 쥐어지르게 나를 놀려댄다.
“웬 안경이 하나 걸어오기에 이상도 하다 하였더니, 가까이 닥쳐 보니까 아, 자넬세 그려.”
하는 말은, 우선 약과로 들어야 하고(6.25사변 전까지는 근시로 말미암아 안경을 썼었다.)
무슨 회합에서 불행히 사회를 맡아 보게 되거나, 목침돌림 차례가 와서 일서서게 되면,
“자네는 서나 앉으나 마찬가지니, 앉아서 하게.”
하는 반갑지 않은 고마운 말도 가끔 듣게 된다. ‘대추씨’라는 탁호(卓號)를 받게 된 것은 단단하다는 의미 외에, ‘작다’는 뜻이 더 많이 내포되었다는 것을 빤히 짐작하게 되었고, 일찍이 소인구악부(小人俱樂部,주로 교원으로 성립됨)의 패장을 본 일이 있었으나, 내 위인이 꺽져서가 아니라, 키가 가장 작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은 다 말로만인지라, 그다지 탓할 것도 없고, 마음에 꺼림직한 것이 조금도 없다.
그저 마이동풍(馬耳東風)격으로 흘려만 보내고 받아만 넘기면 뱃속은 편할 대로 편하여 천하태평이다.
그러나, 가장 질색한 노릇은 무슨 구경터 같은데서 서서 볼 경우에 키가 남보다 훨씬 크다면 사람 우리 테 밖에서 고개만 넘석하여도 못 볼 것이 없을 터인데, 나와 같이 작은 키로는 구경꾼들의 옆구리를 뻐기고 두더지처럼 쑤시고 들어가서 제일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현대의 공중도덕의 수준에 있어서는, 나로서 이러한 모험을 감해하려면 우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심과 대사일번(大死一番)의 노력이 필요하므로 대개는 애당초부터 단념하고 말게 된다. 내가 만일 구경을 즐기는 벽(壁)이 있었더라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추렴을 내서 먹는 자리가 있다고 하자. 체소(體小)한 필자는 본래 먹는 분량도 적거니와 먹는 템포조차, 이 세상에 그 유례가 다시없을 만큼 느리기 때문에 내 젓가락이 음식그릇에 두 번째 들어가기 전에, 한 듀럭이 다 달아나고 말게 된다. 돈은 돈대로 내면서도 음식은 맛도 채 못 보고 물러나게 되니, 억울하기가 한이 없다. 먹는 데뿐이 아니다. 입는데도 마찬가지다. 옷감은 키 큰 사람의 것보다 절반쯤밖에 아니들 터인데, 값은 언제든지 전액에서 일분의 에누리도 없다. 구두를 사도 한 모양이다. 내가 일찍이 모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적의 일이다. 선우김씨라는 분이 지배인으로 있었는데, 이분의 키는 푼치(分寸) 틀림없이 나의 갑절은 되었었다. 한번은 양복 장사를 불러서, 함 벌 맞추기로 하고 절가(折價)를 하여 놓았다.
나의 칫 수를 다 잰 다음, 누구에게든지 한 값이냐고 따졌더니, 양복점 주인은 두말없이 ‘오케이’를 하였다. 그때에 선우선생이.
“나도 한 벌 맞춥시다.”
하고 일어서니, 양복점 주인이 입을 딱 벌리고 한참 쳐다보다가
“선생님은 특별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겨대서 같은 값으로 한 일이 있었다.
이렇듯 키 큰 이가 나의 덕을 본 일이 있었지만, 내가 키 큰 이의 덕을 입은 일은 꿈에도 없다. 요컨대, 나는 결국 양복에 있어서나, 구두에 있어서나, 항상 키 큰 이를 보조하여 주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허접쓰레기 사건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마음에 안타까울 것도 앵하게 생각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이타즉이기(利他卽利己)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만족하고 유쾌하게 여길 일이다.
키 작은 사람으로서 가장 타격이 큰 것은 외교에 있어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있지마는 여인교제(與人交際)에 있어서는, 몸집이 부대(富大)하고 신수가 미끈한 것이 우선 첫인상으로 효과 백 퍼센트다. 이 첫인상이란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워낙 작고 오종종하고 졸토뱅이로 생겼으면 남에게 한 손 잡히는 것이 열이면 열 번이다. ‘고추는 작아도 맴기만 하다’라든지, ‘제비는 작아도 강남만 잘 간다’라는 속담이 통하기 전에, ‘산이 커야 골이 깊지’하는 선입견을 주기 쉽다. 그리하여 열 냥중(兩重) 나가는 사람이라면 닷 냥중밖에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3군을 질타하는 대장군이 된다든지, 의병이나 기타 민간단체의 두복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시세를 만회하려는 혁명아적 기상을 발휘하는 데는, 그리고 또 세계의 국제 관계를 앉은 자리에서 바둑이나 장기 두듯 하는 대외교가가 되는 데는, 우선 체수가 두둑하고 면상이 희멸겋게 생겨야 입선의 제일 관문을 무난히 통과할 것이다. 필자가 30여 년을 두고 한결같이 분필(백묵)가루만을 먹고 사는 것은 이러한 점에 실격된 선천적 운명인지도 알 수 없다. 도대체 그 흔해빠진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늙는 판이 아닌가.
이러한 넋두리를 듣고- 아니 읽고- 필자를 동정하는 사람이 있어,
‘네 키가 작다 하니, 대체 몇 자 몇 치가 되느냐?’
고 물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대답하여 두겠다.
대학 예과에 입학할 무렵에, 잠방이 하나만 입고, 양말까지 벗어버리고 그리어 보니, 꼭 5척 0촌 2푼이었다. 어쨌든 5척 이상이니까, 군인이 되는 데 키로서는 우선 합격권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의기양양할 것은 없어도, 또한 자포자기할 필요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체소하기 때문에, 관심은 키 큰 사람에게보다 키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이 간다. 어떤 기회에 혹은 거리를 다니다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면, 기어이 따라가서 내 키와 넌지시 견주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난장이 아니고는 내 키보다 더 작은 이가 있을 리 없지마는,그러나 전연 없는 바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속담화(俗談化)가 되어 있지마는, 진정인지 김부귀(金富貴)와 같은 멋 없이 늘씬한 키는 눈꼽만치도 부럽지 않다.
병자호란 때에, 바람 앞에 촛불(風前燈火)과 같은 국운을 두 어깨에 둘러메고 나서서 용하게도 난국을 돌파하여 나간 희세의 외교가인 오리대신(梧里大臣) 이원익(李元翼)선생은 우루마기 길(丈)이 자 여덟 치였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니, 이 자(尺)는 오늘에 우리가 쓰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필시 침자(針子)이었겠지마는, 무던히 작은 키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옛날 이야기는 덮어 두고 현대의 예를 들기로 한다면, 초대 부통령이시던 성재(省齋) 이 시영(李始榮)선생과 우연한 기회에 가까이서 본 일이 있지마는 나보다 두어 주먹노리는 없을 만큼 무던히 작은 키의 주인공이었다.
용기백배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마는, 키 작은 것을 비관하여 염세 자살과 같은 쑥스러운 연극을 벌여 놓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생각이 일층 강화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여 둘까?
작년(4288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어느날 저녁 구 관립영어학교 동창들의 만찬회를 ‘미장’그릴에서 베푼 일이 있었고 , 이 자리에는 객원격(客員格)으로 미국 사람 두 분이 참석한 일이 있었다. 시장기가 해소되고, 주기가 돌고 한 연후에 탁상일화(卓上日話, table speech)를 돌려가며 한 마디씩 하게 되었다. 필자의 차례에 와서는, 미국에도 다녀오고 하였으니, 영어로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투른 영어로 다음과 같은 일절을 나의 이야기 중에 끼어 넣었었다.
“…… 한국에서는 나의 키가 작은 줄만 알았더니, 미국에 가서 그렇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는 나보다 키 작은 사람을 좀체로 찾아낼 수가 없었는데, 미국에를 가보니 나보다 작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특히 동북지방 뉴우요오크 근처에 가서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일동이 박장대소를 하였지마는 미국 친구 두 사람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듯이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필자와 영어 학교의 동기되는 해공(海公)이 일어서더니,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마디 하겠다”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1916년부터 동22년까지 대영제국의 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제1대 듀포백작의 영위(榮位)를 받은 세계적 대 정치가 ‘로이드 조오지’(David Loyd George, 1863~1945)씨는 키 작기로 유명한 분인데, 일찍이 정견발표를 하기 위하여, 또 연설을 듣기 위하여 수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큰 기대를 가지고 모두 긴장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로이드 백작이라고 생각될 만한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그림자를 감추고, 어디서 난장이 쇰직한 조그만 사람이 단상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군중은 너무도 의외의 광경에 긴장이 일시에 탁 풀리고, 크게 실망하는 빛이 장내에 떠돌았습니다. 대정치가인 ‘로이드’백작이 낌새를 못차릴 리가 만무하였습니다.
그는 첫 허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합니다.
‘여러분은 키의 대소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려 드나보마는, 키를 측정하는 방법이 고금이 같지 않소. 옛날에는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까지 재는 것이었지마는, 현대의 방법으로는 정수리에서 턱부리까지 머리의 장단을 재는 것이오. 여러분, 어디 내 머리를 좀 재 보시오.’
하였다고 합니다. 로이드씨의 머리는 과연 길었습니다.
이 한 마디에 군중은 그만 감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불을 내뿜는 듯한 그의 웅변에 다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니다.
이상이 해공의 이야기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이야긴지, 그저 유머로 한 이야긴지 알 수 없으나, 두 가지가 다 겸한 것이 아닌가 하여, 나는 새삼스럽게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다지 짧지는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