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 윤남석
볼쏙, 돌담 위로 볼쏙 고개 내민 야나한 호박순이 산들바람에 살랑인다. 호박순이 앙증스런 손마디를 나풀대며 맨 위에 얹힌 돌, 움켜쥘 기회를 엿본다. 똬리 튼 호박순의 곰질대는 폼이 능청맞다.
저러다가
절호의 기회다, 싶으면 확실한 확보에 나서겠지. 그렇게 안정된 확보가 이루어지면, 뒤따라 넝쿨이 휘감으며 올라서고, 그다음에 호박잎이 담을 아늑하게 감싸겠지. 넝쿨과 잎줄기 사이에 돋아난 노란 꽃잎은 벌을 끌어들여 가루받이하고, 작달막한 열매 맺게 하겠지. 보송한 솜털 돋은 열매는 이슬방울로 목을 축이고 풀벌레와 소곤거리겠지. 그렇게 바깥세상에 눈뜰라치면 제법 보로통해지겠지. 얄따란 옷 속으로 비치는 속살처럼 관능미를 넌지시 흘리면, 이내 손을 타겠지. 하지만 널따란 잎사귀 속에 숨어있던 열매는 나팔대는 잎 사이로 청청한 하늘 훔쳐보며 는질맞은 웃음, 애써 감추겠지.달보드레한 달빛이 처진 어깨, 도닥일 때면 달덩이 닮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겠지. 달뜬 가슴은 딴딴하게 영글어가고 이내 푸르뎅뎅한 살갗은 휘영청 달빛, 닮아 가겠지. 달이 둥글면 이지러지고 그릇이 차면 넘친다, 고 했던가. 매정스레 무서리 내리면 위용 떨던 잎과 넝쿨은 청올치처럼 뻣뻣해지고, 돌담 위엔 잘 여문 청둥호박이 주인을 기다리겠지. 아마.
이렇듯, 돌담에서는 무수한 이야기꺼리가 생겨나고 익어 간다. 돌담은 언제나 짐벙지게 사설, 풀어낼 줄 안다. 호박순이 나풀거려도 벌써 커다란 늙은 호박으로, 이야기가 스르르 스민다. 한겨울에 눈꽃 내려앉은 시드럭부드럭한 줄기를 보더라도 다음해 봄에 기웃거릴 야드르르한 호박순을 떠올리게 한다.
다감한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호박순도 어쩌면 거친 담을 기어오르기보다 널찍한 밭두둑에 드러누워 마음 편히 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담 이야기>에 캐스팅된 것은 순전히 담 밑에 호박구덩이를 판 주인의 본뜻대로 순순히 따랐을 뿐일 게다. 허전한 담벼락에 호박넝쿨도 올리고 덤불콩도 심고 싶은 게 주인의 마음이다. 하지만 싹 돋고 힘찬 등정이 시작되면, 호박넝쿨과 덤불콩의 기어오르려는 습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치 주인을 꾀어 담 밑에 심어달라고 조르기라도 한 듯 불끈한 줄기가 앙그러지게 담을 뒤덮는다.
담에는 주인 의도와 작물의 덩굴성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성식물蔓性植物 중에서도 어지간히 속을 썩이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이 주저 않고 그 배역을 자처한다. 며느리, 며느리, 하찮고 궁색한 것을 며느리와 연관 지은 옛날 사람들의 심보가 그대로 묻어 나온다. 배꼽은 그렇다 치고 밑씻개란 이름은 참으로 얄궂다. 그러나 아픈 전설을 간직한 그 밑씻개의 악물스러움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고개 쳐든 사마귀처럼 상대방을 노려보는 표정에서-온라인 액션 RPG 「던전 앤 파이터Dungeon & Fighter」에 나오는-'여귀검사'의 눈빛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환삼덩굴이란 걸출한 '격투가'가 등장한다. 열혈 쾌남 캐릭터 환삼덩굴의 잎은 수산자원을 황폐화시키는 불가사리를 닮았다. 그냥 놔두면 천적 없는 포식자처럼 무섭게 그 세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뽑아내도 끈질기게 다시 줄기를 뿜어내는 질긴 생명력은 호박과 덤불콩 줄기를 배배 꼬면서까지 담장을 먼저 점령하려 드는 억센 근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양식장의 이매패二枚貝를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처럼 마냥 유해하기에 제거하려 들면, 각진 줄기에 돋은 잔가시로 거칠게 대항할 줄도 안다. 선 굵은 연기파 배우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모처럼의 기회인데, 왜 갑자기 하차시키려 하느냐, 는 투다. 알다시피 악역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처럼 천부적으로
【땡 · 깡】을
부릴 줄 아는 끼를 타고나야 가능한 게다, 리얼한 감초 연기가 더해져야 <돌담 이야기>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는 식이다. 주연 배우도 혼자만의 연기로 뜨는 게 결코 아닐진대, 적당한 핍박을 견뎌야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되고, 보다 깊은 페이소스를 이끌어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모르느냐, 는 항거를 잔가시 통해 표출하게 된다. 이렇게 담장에서는 처절한, 전쟁 같은 연기가 펼쳐진다. 그들의 치열한 리그전은 늦가을에 부유스름한 엄상嚴霜을 살포해야만 가까스로 진정된다. 좀 더 빡센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었는데, 하는 미련을 남긴 채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링에서 순순히 내려온다.
고샅을 걸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넘쳐난다. 그 생각은 돌담에 쟁여진 돌의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하다. 야트막한 담 너머로 노란 개나리꽃이 배시시 웃음을 띠기도 하고, 깔때기모양의 능소화 화관이 함빡 터지며 오관五官에 달곰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담쟁이덩굴이 친친 전착한 돌담에서는 더욱 아기자기한 표상이 덩굴손의 흡착근처럼 뻗어 나간다. 그 심상은 여미한 지각표상으로 오래도록 머문다.
돌담길을 걸으면 마음이 정화된다. 돌담은 내부와 외부공간을 엄격히 구분 짓지만, 늘 이야기보따리 매듭이 느슨히 풀려 있어 차단된 두 공간이 동화됨을 느낄 수 있다. 친화하려는 생명현상이 공존동생하기에 두 공간은 서로 관입하고 관통되며 창조적인 공간으로 고상하게 변모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담은 상호관입되는 공간구성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요즘 담장은-경계와 방어의 역할로만 위축되어 버린 듯하다. 요새처럼 두껍고 높아서 위압적인 분위기만 서늘하게 흐른다. 삭막하고 갑갑하다. 게다가 담 위에 쇠꼬챙이나 철조망으로 얼키설키 엮어 놓아 철창같이 살벌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또 깨진 유리병을 촘촘히 박아 놓아 그 어떤 것의 관입도 철저히 봉쇄하려하는-각박함을 연출한다. 담장이 얼음처럼 차갑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영구빙벽이다. 담장에 박아 놓은 깨진 병처럼 예리하게 날 선 극단의 이기주의가 앙칼져 보일 따름이다.
담이 높다는 것은 은폐하고 싶은 심리가 깊게 깔려 있다. 외부와 소통보다는 방어를 더 중시한다. 바깥에 대한 배려에는 너무나 인색한 나머지, 방벽은 폐쇄적으로 비춰진다. 침해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심리적 안정을 꾀하려는 것이지만, 높은 담이 사회적 거리의 간격을 더 벌려 놓는다. 그러한 물리적 환경은 끈과 띠를 소원하게 하고 서먹한 거리감을 만든다. 담은 내. 외부를 나누는 물리적 기능도 수행하지만 주변 환경과 적당히 어울릴 수 있는 거리의 소품 역할도 한다. 그러나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려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미묘한 심리는 에워싸기에만 급급하다. 그 고집스런 심리는 단조롭고 딱딱함을 표출되는 게다.
담에도 표정이 있어야 한다. 끌밋하고 참한 맛이 녹아 있어야 한다.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생기 있는 표정이 묻어나야 한다. 반듯반듯 획일적이지 않은, 그윽한 정취가 흠씬 풍겨지는 그런 구수하고 질박함이 느껴져야 한다. 담 너머 호박순처럼 싱싱함이 피어올라 훈훈한 감화를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말이다.
담장 허물기 사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둔탁한 담장이 있던 자리에 자연석과 떨기나무가 운치 돋우니 한결 친근감이 든다. 집을 담으로 빙 둘러싸기만 했던 질긴 내향적 관습이 차츰 변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담장을 허문다, 는 것은 이웃간의 두꺼운 벽을 없앤다, 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담장뿐 아니라 미덥지 못했던 그동안의 마음의 벽도 해말끔하게 터졌으면, 싶다. 그래서 굳게 닫혔던 말문도 트여 도타운 정이 다보록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담장이 허물어지면서 관리 문제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간간이 나오곤 한다. 어렵사리 탈바꿈시킨 공간은 함께 아끼고 지켜야 더욱 돈후해진다.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회적 분위기의 성숙이 더욱 절실하기만 하다.
상크름한 바람에 호박순의 나풀거림이 더욱 활기차 다. 돌담에서는 안과 밖을 스스럼없이 순환시키려는 고로의 몸짓이 두드러진다. 너그럽게 감싸 안으려는 풋풋한 몸짓이다. 희망의 포용이다. 말랑거리는 호박순에 사뿐히 내려앉은 햇살까지 사뜻하다. 문득,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던 영랑永郞의 시구가 앙큼하게 손짓한다. 그래,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자.
말쑥한 하늘이 너르게 껴안는다. 돌담에서는 여전히 자리자리한 속삭임이 몽글댄다. 햇살과 하늘이 돌담과 호박순에게 나지막이 건네는 속삭거림이 들려온다. 솔깃한 그 귀엣말, 귀 기울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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