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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김정화

에세이향기 2022. 4. 1. 21:27

거룩한/김정화 

 

누구나 마음에 담아두는 말 한두 마디 정도는 있을 게다. 주변인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제각각이다. ‘흙둔지’라는 말에는 향수를 느낀다는 친구. ‘보고 싶다’라는 글자만 보아도 심장의 무게가 내려앉는다는 사람. ‘카르페디엠’을 외치면 엔도르핀이 솟는다는 지인도 있다. 반면, 삶이 순탄치 않은 K시인은 통곡하기 알맞은 장소를 찾아 몇 년째 ‘호곡장好哭場’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기도 하고, ‘눌인訥人’이라는 단어가 어눌한 자신을 칭하는 것 같다며 아예 아호로 정해버린 스승도 있다.

 

그들처럼 나도 요사이 관심을 두게 된 말이 하나 생겼다. 바로 ‘거룩한’이라는 다소 무거운 형용사이다. 이 말을 좋아하게 된 연유는 오로지 H 선생님 덕분이다. H 선생님과는 수년간 같은 지역의 문학단체 회원으로 알게 되었다. 희수를 맞은 연세에도 나이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젊게 보이는데 그 까닭은 항시 머금고 있는 웃음살 때문이라 여겨진다.

 

지난 늦여름, 분기탱천하던 매미 소리가 뚝 끊어진 어느 날이다. 평소 따뜻한 마음을 열어 주는 H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져 전화를 드렸다. 지나는 길이면 잠깐 들리어 동인지 원고를 받아가라는 응답을 하신다.

 

그분이 소일 삼아 지내는 사무실을 찾았다. 낡은 소파에 기대어 한자가 빼곡히 적힌 약초도감을 줄 쳐가며 읽고 계시다가 나를 보더니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작설차도 미리 끓여놓았고 내게 줄 막사발 두 점도 신문지로 겹겹이 싸 놓으셨다.

 

그날, H 선생님과 인근식당에서 가벼운 점심도 함께했다. 선생님은 말씀 도중, 이십여 년 전에 사별한 첫 부인을 떠올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에는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휴지 뭉치를 안고 살았다고 한다. 면전에서 노수필가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남도에서 설국雪國을 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나는 당황하여 상 위에 놓인 맹물만 자꾸 비워내고 있었다. 헤어질 즈음, H 선생님이 즐겨 쓰는 한 단어가 가슴을 찔러댔다.

 

그분은 첫 부인과 살았던 시절을 두고 “망처가 된 그 사람과 보낸 거룩한 시간”이라 잊을 수 없다 했다. 그 ‘거룩한 시간’을 글로 표현할 수 없어서 더없이 거룩하다 했다. 나에게는 “거룩한 시간을 내 주어서 감사하다.” 했고, ‘거룩한’ 품성을 가지면 ‘거룩한’ 응답이 있을 거라 용기를 주었다. 심지어 식당 아주머니께서도 “거룩한 점심상을 차려주어서 고맙다.”라고 했다. 특정 종교도 가지지 않은 그분과의 대화 도중 ‘거룩한’은 무시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거룩한’이라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머릿속은 온통 ‘거룩한’으로 물들어갔다. 비를 버금은 하늘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게 보였고, 운전하기 어려운 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도 거룩한 길로 바뀌었으며, 전화기에 찍히는 광고 문자까지 거룩한 안내판으로 여겨졌다. 그럴 듯했다.

 

나는 그날, 떠오르는 낱말마다 ‘거룩한’을 붙여 H 선생님을 흉내 내었다. 거룩한 말, 거룩한 눈물, 거룩한 풍경, 거룩한 그림자……. 몇몇 지인에게도 “거룩한 어쩌고저쩌고…….” 하며 전화 응답을 해 보았다 하지만, 모두 어디 까마귀가 우짖느냐며 외면할 따름이었다.

 

그분의 ‘거룩한’과 나의 ‘거룩한’이 왜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어조도 다르고 발성도 다르다. 그러나 이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연륜이 쌓인 H 선생님의 ‘거룩한’은 마음으로부터 길어올려진 마음소리지만, 나의 ‘거룩한’은 오직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입말이기 때문이리라. 하물며, “좋은, 멋있는, 괜찮은” 등의 말에도 마음소리와 입소리가 있을 터인데, 적어도 ‘거룩한’이라는 단어가 상대방 가슴을 적시려면 조금이나마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겠거늘. 나 같은 무지자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감불생심敢不生心이 아닐까. 묵침黙沈할 수밖에.

 

나는 오늘도 ‘거룩한’이라는 언품 앞에 준엄히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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