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길
김신용
그들의 함성에 중장비의 엔진은 호흡을 멈추었다.
현장 본부 앞마당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답답한 가슴을 치듯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노동해방가를 부를 때, 파헤쳐진 공사장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이 땅의 곳곳에서
또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일용 인부들
그들의 힘찬 구호의 외침에 눈물마저 글썽였다.
이 하루, 공쳐도 좋았다. 그 수많은 나날
무릎 꺾여 살아온 노동의 하루쯤 무너져도 좋았다.
(……)
그들의 몸부림에 손톱 하나 보탤 수 없는 우리는
들풀처럼 부끄러웠다. XX토건,
노란 회사 마크가 새겨진 그들의 곤색 잠바 유니폼은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윽고 며칠간의 파업은 끝났다.
그들의 고정급은 올랐고, 시간차 수당도 받게 되었다.
모든 중장비의 심장은 뜨겁게 박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새벽밥 먹은 통근차가 다니고, 우리들은
식반에 담긴 별을 헤아리며 새벽 함바를 나섰다.
여전히 앙상히 손금 드러낸 품삯을 받기 위해
왼종일 삶의 껍질을 벗겨내고, 또 뿔뿔이 흩어지는
저녁길, 그래, 한 사람이라도 더 잘살아야지……
헌 작업복, 흙투성이 운동화 발에 밟히는 공사판은 어스름 속
콘크리트와 철근의 뼈대만 앙상히 도드라져 있어도……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 난 것들의 향기/조호진 (0) | 2022.07.30 |
---|---|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0) | 2022.07.30 |
환상통 幻想痛 /김신용 (1945~) (0) | 2022.07.30 |
아버지의 이/강경호 (0) | 2022.07.30 |
넝쿨의 힘 / 김신용 (0) | 2022.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