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돈꽃 / 문경희

에세이향기 2023. 1. 7. 06:56

돈꽃 / 문경희

 

누군가의 위험천만을 목적지로 찍고 왔다. 타인의 불행을 내 행복의 척도로 삼겠다는 심사는 고약하지만, 오늘을 보기 위해 며칠을 손꼽았다. 그가 연출하는 백척간두의 순간을 함께 출렁이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삶의 들메를 다잡아보고 싶었다.

공터는 이미 삼현육각의 신명으로 들썩이고 있다. 켜고, 불고, 두드리고, 인간과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로 주추를 놓고 지붕을 올린 소리의 성채 하나가 장대하게 일어선다. 내 안에서 나달거리던 소리들이 화답을 하는 건지, 두서없이 심장이 쿵쾅거리며 걸음이 빨라진다. 한껏 데시벨을 높인 소리의 휘장을 열어젖히고 공터의 왁자함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소리가 예열해놓은 분위기를 밟고 자그마한 체구의 줄꾼이 등장한다. 이마를 질끈 동여맨 무명천 위로 가볍게 얹힌 패랭이, 하얀 무명 한복에 다부지게 장딴지를 감아 오른 행전行縢까지, 채비가 예사롭지 않다. 집채 만 한 봇짐을 지고 외진 산모퉁이를 꺾어 도는 역사극 속의 보부상을 연상케 한다. 굶주린 산짐승도, 삶에 주린 도적떼도, 비바람 눈보라까지도 서슬 퍼런 기세로 눈을 홉뜨는 길 위에서 안전한 목숨이 어디 있었으랴. 봄여름가을겨울, 도돌이표가 찍힌 악보처럼 수십 번의 사계가 가고 또 오는 계절의 윤회 속을 걸으며, 살기 위해 삶을 담보해야 하는 아이러니쯤은 무덤덤한 일상이 되었을 게다. 걸음걸음 도사린 생과 사의 칼날에 맞서기 위해 생계라는 소명의 갑옷으로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지난했던 삶. 짚신 두어 켤레를 매달고 탈래탈래 걸어 넘던 십이령 고개만큼이나, 줄꾼이 몸을 실어 가야 할 길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줄꾼을 어름사니라고도 한다. ‘사니’는 사람의 재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신묘한 재주를 가졌으되 신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란다. 사람과 신, 그 중간 즈음의 능력자라 할까. 하긴, 신이라는 뒷배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저 간당간당한 외줄을 방석 삼아 세상 편한 너스레를 주저리주저리 꿸 수 있단 말인가.

밥을 벌기 위한 길이 누구에겐들 평탄하랴. 허공에서 낭창대는 삼줄과, 줄을 괴는 네 개의 작수목이 줄꾼을 재촉한다. 괴물처럼 앙버틴 그들의 눈빛이 호의인지 적의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3m 높이의 아뜩한 상공에서 고작 3cm만큼의 안전을 보장하는 줄이라는 좁디좁은 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른침이 삼켜진다.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위태한 길 위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줄꾼의 담대함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길을 확신으로 밟기까지 그는 얼마나 오랜 실패와 좌절과 나락의 시간을 거쳐 왔을 것인가. 길의 중심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중심에서 멀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했는지도 모른다. 수없이 무너지고 일어서며 몸보다 마음의 굳은살을 두텁게 앉히는 것이 그가 터득한 낙법落法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신체기관 중 우두머리는 입이지 싶다. 먹기 위해 살든, 살기 위해 먹든, 입을 배제한 삶은 존재할 수가 없다. 하여, 잘난 이나, 못난 이나 평생 입을 충족시키는 일로 분주하다. 입이 요하는 삼시 세끼를 외면하고서는 삶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물주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입에 심어놓았으니,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입은 끝내 섬겨야 할 대상인 셈이다. 그렇다 한다면, 세탁조 속의 빨랫감처럼 내처 먹는 일로 휘둘리며 살아야 하는 것은 입을 모시는 자들의 숙명이라 할까. 어쩌면, 고적한 길 위에 삶을 부려야 했던 등짐장수도, 훤훤장부처럼 허공을 밟고 선 저 줄꾼도 입의 하명에 떠밀려 세상 속의 난감한 세상에 섰는지 모를 일이다.

“먹고 살기 참 힘듭니다, 그려. 염병, 배워도 참 지랄 맞은 것을 배워 가지고….”

독백인지, 방백인지, 능청스레 뇌까리는 한마디로 공연의 서막이 오른다. 더듬이를 곧추 세운 한 마리 곤충처럼 쥘부채를 있는 대로 펼쳐 든 모양새가 제법 호기롭다. 흔들리는 줄 위에서도 직립을 잃지 않고, 끈질긴 만유인력의 으름장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뚝심이 저 얄팍한 부채의 헌신 덕분이라니. 그의 성공적인 활착을 위해 ‘더’한 것을 덜어내고 ‘덜’한 것을 보태며 펄럭펄럭 바람과 흥정을 하는 부채의 선전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고작 부채 하나로 거대 바람에 맞서겠다는 배짱이 가소롭기는 하지만, 줄꾼은 이미 허공을 지지대 삼아 의지가지없는 절대고독 속으로 스스로를 방사할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언젠가, 줄 위에서 느끼는 고요를 자기 삶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는 어름사니를 보았다. ‘시간이 정지 된 느낌.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도 끼어들 수 없는 고요를 통해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진다.’고 줄 위의 시간을 피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줄 위의 세상이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오로지 후들거리는 공포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출렁, 팽팽한 줄의 탄성이 그를 받아낸다. 굿거리에 휘모리, 타령조의 장단이 그를 호위하지만,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가락처럼 가벼이 누릴 수 있는 길이었다면 밥의 수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밥의 주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이라서 오늘도 그는 몇 번이고 생사의 깔딱고개를 남몰래 넘어야 하지 싶다.

관객들의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며 그의 두 발이 오달지게 줄을 움켜쥔다. 바람의 장애물이 무시로 그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추락의 예감으로 먼저 사색이 되어버리는 건 외려 객석이다. 탄성과 외마디 비명을 번갈아 오가며, 보는 이들도 그의 몰입을 향한 몰입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수백 개의 눈과 귀를 이끌고, 줄꾼은 신명나게 길 없는 길을 간다. 느릿느릿 양반이 되었다가, 촐싹이는 여인네가 되었다가,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그예 공중제비의 기예까지 펼쳐낸다. 몇 번의 ‘아슬아슬’과 몇 번의 ‘가까스로’가 실제상황이든, 재미를 위해 연출된 것이든, 그의 말대로, 먹고 살기 참 힘들다.

권커니 잣거니, 줄꾼의 재담과 매호씨의 추임새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누군가가 시퍼런 지폐 한 장을 그의 허리춤에 꿰어준다. 뒤질세라 너나없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그의 허리춤에는 금세 누렇고 퍼런 돈꽃이 만발한다. 꽃이지만 꽃이 아니기도 한, 그 얄팍한 종잇장에 괜스레 가슴이 무지근해진다.

사선死線을 넘어 온 자에 대한 환대치고는 소박하지만, 돈은 밥이요, 밥은 곧 목숨이 아닌가. 이 순간이야말로 세상 가장 치열하게 피어나는 꽃의 현장이라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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