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물러가고 어영부영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성큼 문턱을 넘어왔다.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 오니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온이 살갗에 와 닿는다. 요 며칠 비까지 내리더니 으스스 등에 한기가 돈다.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서 부엌에 들어가서 휘휘 둘러보았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나간 후로 나 혼자이고 보니 부엌에서 음식을 끓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오래간만에 열어 본 냉동 서랍 속에는 마른 장작개비 같이 뻣뻣한 고등어가 들어 있고 돌덩어리처럼 언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느끼하거나 비린 것 말고 좀 삼빡하고 개운한 국물을 시원하게 먹고 싶어 냉동서랍을 도로 닫고 옆에 있는 찬장을 열어보았다.
메탈로 된 다용도용 찬장 속에는 스파게티 노란 계란국수와 무명실처럼 가느다란 하얀 소면국수가 들어 있었다. 밀가루 봉지와 설탕봉지 옆에는 겉포장에 양반미역이라고 적혀있는 미역봉지 몇 개도 들어 있었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올 때 식구들이 김과 함께 사 줘서 가지고 온 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이었다. 미역을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무엇을 해 먹을까 망설이던 나는 미역 한 꼭지를 꺼내어 물에 담갔다. 언 빨래처럼 뻣뻣하던 미역은 더운 물에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릇 수북이 불어났다.
물 속에서 불어난 미역은 아기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씻어 건진 미역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참기름을 두르고 미리 달궈 놓은 냄비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뒤적거리다가 물을 붓자 치익- 하고 뿌연 수증기가 천장으로 솟구쳤다. 내 안경에도 김이 서려 시야를 가렸다. 얼마 후 안개가 걷힌 냄비 속에는 뽀얀 국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고기 없이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간장으로만 담백한 맛을 내고 싶었다.
조리대 한쪽 구석에는 샘 표 간장 병 두 개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진간장과 국 간장, 어느 것을 넣어야 하나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아 간장 병 두 개를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미역국은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재래식 간장)으로 간을 해야 제 맛이 나고 개운한데……
조선간장이 떠오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희한한 데가 있었다. 엊그제 있었던 일도 곧장 잊어버리고 손에 든 열쇠를 찾기도 하면서 몇 십 년 전의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다니……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과 달리 60년대, 그 때는 참으로 먹고 사는 일 자체도 힘들어 곤궁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공무원 월급은 형편없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사글세 방세 내고 내가 근무 하는 동안 아기 봐주는 아이 옷 사서 입히고 월급 주고 아기한테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산후에는 미역국을 많이 먹어야 젖이 잘 나온다는데 나를 위해 쓸 돈은 늘 빠듯하기만 했다. 젖이 적은 아기는 조롱박만한 배가 차지 않아 꽃잎같이 작은 입을 휘두르며 내 속을 태웠다.
요즘은 미역도 양식을 하여 흔하고 가격도 웬만하지만 그 당시에는 미역이 비싸서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시중에도 눈에 띄지 않는데 그 당시 빨래판처럼 편편한 미역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평 미역이라고 불렀다. 폭이 30센티미터 정도이고 길이가 70-80 센티미터인 그 미역은 요즘 미역처럼 검고 윤기가 나지 않고 붉은 색이 돋았다. 다른 미역에 비하여 값이 저렴한 그 미역은 국을 끓여놔도 부드럽지도 않았고 뻣뻣하고 맛도 없었다. 그래도 아기를 생각하며 그나마도 감지덕지 하며 끓여먹었다. 빠듯한 살림에 미역 값도 문제였지만 미역국에 들어가야 하는 간장 값도 나에게는 만만치 않았었다…….
내가 당진에서 세 들어 살던 주인집은 회색 기와를 얹은 디귿자 형에 실팍한 대들보가 천장을 가로 지르고 있고 대청마루가 넓은 시골 농가였다. 내가 살게 된 방은 대청마루 옆에 붙은 방인데 조그만 부엌이 딸려있고 동쪽으로 난 문을 열면 작은 쪽마루가 붙어있는 사랑채였다. 주인 집 식구들은 나를 사랑방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집 큰아들인 아저씨만은 아기 이름을 앞에 붙여서 00자당님 이라고 불렀다. 이십 초반에 첫 아이를 낳은 젊디젊은 나에게 자당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들렸지만 예의를 다해서 나를 대해주고 싶었던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던 듯싶다.
앞마당 한 쪽 구석에 있는 외양간에는 저녁이면 들에서 돌아 온 누런 소가 비스듬히 누워 큰 눈을 끔벅이면서 주둥이를 요리조리 우물거리며 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늘 쇠죽 끓이는 냄새가 퀘퀘하게 진동했다.
삼 남매를 둔 아저씨는 혼자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곱게 빗어 쪽을 찐 할머니는 깐깐하신 성품이었다. 당시, 지난해에 회갑을 넘겼지만 정정하셨던 시어머니와 사십이 채 안 된 젊은 며느리 사이에는 가끔씩 보이지 않는 물밑 전쟁이 일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빚어지는 자잘한 일들이지만 두 여인이 충돌할 때마다 튀는 파편들은 그 분들의 아들이고 남편인 아저씨에게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가만히 보니 고부간의 갈등은 그 집이라고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간 첫날부터 그 집 어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당신 자식들에게는 깐깐하였지만 나한테는 어머니처럼 인자하시고 매사에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며느리 또한 나한테 잘해주는 후덕하고 마음씨 고운 전형적인 시골아낙이었다. 두 분 모두 좋은 분들인데 이상하게 고부간에는 하찮은 일 가지고도 매끄럽지가 못할 때가 있었다.
사십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깡마른 체격과 예민해 보이는 인상으로 좀 까다롭게 보였다. 어려워서 말도 잘 못 거는 나에게 그 분은 큰오빠같이 다정하고 친절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데도 아저씨께서는 나에게 늘 존댓말을 쓰셨다.
"00자당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저씨는 아침에 내가 펌프 샘이 있는 마당에 나가면 언제 일어나셨는지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셨다.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아저씨는 시사에도 밝으셔서 대화 할 때마다 묻어나는 해박한 지식에 놀랄 때가 많았다. 또한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섬세한 글을 써서 나에게 종종 보여주곤 하셨다.
별들이 총총한 여름밤에는 마당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평상 마루에 어른들만 모여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한 번은 보름이 가까웠는지 달이 대낮같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00자당님, 간밤에 잠이 안 와서 몇 자 끄적거려 봤어요,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아저씨는 몇 번 접은 줄이 쳐진 종이를 멋쩍어 하며 나에게 내미셨다. 제목은 달밤이었다. 아기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문학소녀의 티를 벗지 못한 나는 신바람이 나서 아저씨의 수필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읽고 난 후에는
"아저씨, 이 대목은 이런 표현이 더 좋지 않을까요?"
라는 등 코멘트를 하면 아저씨는 무릎을 탁 치시면서
"아! 00자당님, 맞아요 바로 그거요!"
하는 것을 보면 아저씨 또한 내가 말한 제안이 상큼하게 느껴지고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저씨의 유연한 문장과 달필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았다.
만삭의 배를 안고 그 집에 들어가서 첫 아이를 낳고 살면서 나는 날이 갈수록 주인 집 식구들과 정이 들어갔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딸처럼 사랑해 주셨고 아기 목욕도 시키고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우유도 먹이면서 아기를 친 손자처럼 돌봐 주셨다. 아기 키우는 경험도 없는 철부지 엄마인 나에게 할머니는 친정어머니 같이 자상했다. 할머니는 숫제 내 방 아기 곁에서 주무시는 밤도 많았다.
군 제대 후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한 애 아빠는 걸핏하면 시어머니가 계시는 공주 집에 가 버리고 없어 나는 아기와 단 둘이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할머니는 젊은 새댁을 혼자 놔두고 어머니 곁에 가 있다고 혀를 차며 애 아빠를 분개하며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달이 뜨는지 해가 뜨는지도 모르게 아기에게 취해서 애 아빠가 곁에 없는 것을 원망 할 줄도 몰랐다. 낳을 당시 콩나물 시루를 얹어 놓고 물을 주던 쳇다리 같이 가늘던 아기 다리에 우유 빛 뽀얀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자고 나면 방긋방긋 재롱이 늘어가고 있을 때 외양간의 소가 송아지를 순산했다.
"음 메에----" 어미 소는 송아지가 잠깐만 눈에 안 띄어도 커다란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목청을 길게 뽑았다. 낳은 지 얼마 안 된 송아지는 껑충거리며 천방지축으로 온 사방을 뛰어다녔다. 어미 목소리를 듣고 송아지가 나타나면 어미 소는 코를 벌름거리며 여린 제 새끼 코에 비비기도 하고 긴 혀를 빼서 핥아주기도 하였다.
순하디 순한 눈망울을 맞추고 있는 외양간의 소가족 모녀 (母女)와 아기의 옹알이에 취해 있는 사랑방 모자(母子)인 우리의 가슴 속에 밝은 햇살 같은 행복이 가득했다. 주인 집 식구들은 사랑방 아줌마는 아들을 낳았고 외양간의 소는 딸을 낳았으니 우리 집에 겹경사가 났다고 좋아했다.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우리 모자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며느리 손에 살림을 넘기고 딱히 할 일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나를 도와주기 시작하시면서 생활에 활력을 되찾게 되신 것 같았다. 나와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며느리와 신경전을 벌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은근히 바람 잘 날 없던 집안에 훈훈한 미풍이 일고 있었다. 새로워진 집안 분위기를 제일 좋아하시는 분은 아저씨였다. 내가 보기에도 효자이신 아저씨는 홀로 되신 어머니를 섭섭하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부인을 다독이느라 중간에서 피곤해 하셨다. 어느새 나는 주인 집 가정에 평화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이 아니라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날마다 미역국을 끓여먹는데도 우리 집 간장 독(단지)은 퍼내도 항상 채워지는 화수분처럼 줄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역국을 끓일 때 비싼 간장을 아끼느라 간장은 색깔만 나게 조금 넣었고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친정 집 장독대 커다란 항아리에 새카맣게 그득 차 있던 간장이 눈에 어른거렸다.
하얀 자갈이 정갈하게 깔려 있는 주인 집 장독대에도 아름드리 간장독이 버티고 서 있었다. 고추장 된장이 담긴 크고 작은 옹기 단지들이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장독대에 진열되어 있는 까만 옹기그릇들은 햇볕을 받아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주인 집 간장독은 몇 말들이나 되는지 엄청나게 커서 그 속에서 한 두 바가지 퍼낸다고 해도 표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애기 엄마, 간장 애끼지 말구 맘 놓고 국 끓여 먹어."
할머니는 며느리가 시장에 간 사이에 간장을 몇 바가지 퍼다가 부엌 한 쪽 구석에 초라하게 서 있는 내 간장 단지에 부어주며 가만히 속삭이셨다. 바닥을 보이던 간장 단지에 시커먼 간장이 중턱까지 쑥 올라왔다. 나는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뿌듯했다.
며칠이 지난 후, 할머니는 이웃 마을에 사는 작은 아들 집에 볼 일이 있다며 가셨다.
"사랑방 아줌마, 간장 사 먹지마, 우리 집에 간장 많으니께 애끼지 말구 먹어."
이번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안 계신 틈을 타서 얼른 간장을 퍼다가 내 단지에 부어줬다. 두 분들은 서로가 없는 틈을 타서 번갈아 가며 우리 집 간장 단지에 간장을 퍼다 부었다. 나는 이 일을 양쪽 어디에도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분들은 날마다 열어봐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는 우리 집 간장 단지를 보면서 내가 아끼느라고 안 먹는 줄로 생각했다.
"간장 애끼지 말구 맘 놓구 먹어."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날마다 똑같은 말을 내 귀에다 대고 살짝살짝 하셨다. 그 때 그 분들이 내 간장 단지를 채워 주신 것은 간장보다 더 진한 사랑이었다. 가난 했지만 푸근한 인정이 꽃피던 시절,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슴에 보약이 되어 오늘도 내 혈관 속을 뜨겁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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