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자서전/이미영

에세이향기 2022. 12. 31. 21:46

자서전/이미영




  맨몸뚱이는 말 없는 자서전이다. 화려한 수사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구차한 변명도 발붙일 곳이 없다. 외면하고 싶은 상처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솔한 기록장이요 여과 없는 유리알 공책이다. 흠집하나 없는 아기의 맨 몸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기어이 만지고 안아보게 만든다. 혈관마저도 펄떡이며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젊은 나신에서는 세상을 움직여 보리라는 기운이 뻗친다. 무조건반사로 가슴이 뛴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살갗과 그 아래로 드러나는 골격이 안쓰러운 노년의 몸에서는 구절양장의 이야기를 읽는다. 애잔함에 눈앞이 흐려진다.
  나는 선뜻 목욕탕에 가지 못한다. 샤워 할 때에도 금방 해치우는 버릇이 배었다. 오래된 교통사고의 흔적이 아직도 가슴을 조여 오기 때문이다. 무릎에 버티고 있는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흉터는 여전히 우당탕 소리를 낸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일이지만 고속도로에서 깡통처럼 나뒹굴었던 순간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당시의 현장 사진으로는 사망이 당연했던 대형 사고였다. 겨우 무릎에 상처 하나 남기고 멀쩡하게 다시 살게 되었으니 천운으로 여겨야 마땅할 터이다. 억세게 좋은 운의 상징으로 삼아 볼 때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스무 해나 흘렀어도 이식한 피부조직 같은 허연 흉터가 드러나면 때 없이 심장이 요동친다. 아이들의 늦은 귀가 때문에 꾸역꾸역 운전석에 앉는 순간보다 작은 흔적에 더 쉽게 상기가 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며칠째 목욕탕에 가자고 전화를 걸었다. 속사정까지 알 리가 없으니 섭섭한 내색을 비췄다. 아파트 단지 안에 주민편의 시설로 문을 연 곳인데 회원으로 가입 했단다. 무료나 다름없다고 보채듯 연락을 한다. 등을 밀어드리는 일은 언니 몫으로 되어 있는데 공짜 덕분에 나까지 엮으려나 싶었다.
  벌써부터 할머니 대열에 속하는 엄마를 계속 혼자 다니게 하기는 속이 개운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약속을 잡았다. 목욕 바구니를 들고 건물 입구에서 반가이 손짓하는 노인이 우리 엄마라니 인정하기 싫었다. 집에서 볼 때는 어릴 적부터 각인된 그 모습 그대로 이었지만 눈부신 한낮의 태양 아래 서 있으니 영락없는 할머니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차려주고 필요한 것은 언제나 마련해주는 엄마 역할만 저장되어 있었다. 당신을 엄마라는 이름 말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낯선 당신을 목욕탕에서 만났다. 한 겹 두 겹 벗을수록 드러나는 맨몸에서 칠십 년을 훌쩍 넘긴 한 인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세월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풍파를 겪어낸 객관적인 피사체가 되어 불쑥 다가왔다. 똑바로 펴지지 않는 어깨 하며 아귀가 딱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튀어나온 관절 하며 벗은 육체가 전부 삐걱거리고 있었다. 마른 오이처럼 쭈글쭈글 늘어진 배는 더 못 볼 지경이었다. 부풀었다 꺼지기를 다섯 차례나 반복한 탓에 쳐지고 군데군데 살이 터졌던 자국은 시간에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나마 타고난 바탕인 희고 고운 피부의 여운이 머릿속의 엄마 모양새를 붙들고 있었다.
  나를 번쩍 들어 옮기던 팔의 근육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때를 밀기 싫다는 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닦아주던 야무진 손은 온데간데없었다. 곱다는 소리를 듣던 자태는 시들어 말라 버렸다. 내가 매달려 곧은 등줄기를 휘어지게 했음이 분명하다. 푼푼하지 못한 언니의 살림살이 때문에 쭈그렁텅 해졌음이 틀림없다. 한눈에 들어오는 애달픈 이야기를 읽어 내릴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다. 샤워기의 물줄기가 비누 거품을 씻어 내리고 눈물방울도 함께 데려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의 등을 닦았다. 빳빳하던 등이 쑥 꺼져있다. 손을 짚는 곳마다 탄력이 떨어진 탓에 손가락 자국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구석구석 정성을 들이던 내 손길이 아린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차츰 속도가 떨어졌다. 엄마의 남루한 몸에는 자신의 사연을 찾기가 어려웠다. 당신의 자서전은 온통 피붙이들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둘러 탈의실로 나와서 물기를 쓸어내고 바지부터 입었다.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흉터 한번 질기다.” 바지를 추켜올릴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애써 모른 체한 게다. 엄마의 몸에만 자식새끼들의 사연을 채운 줄 알았더니 속까지도 우리들의 아픔을 품고 살았나 보다. 더는 억지로 목욕탕에 가지 못하겠다. 공짜목욕으로 마음은 천근만근의 무게를 떠안게 되었다.
  뱉을 수 없는 말이 더 저린 법이리라. 내 몸에 새겨진 오래된 아픔을 엄마는 숨죽이고 바라만 보았나 보다. 자신의 볼품없이 변한 몸보다 자식의 무릎에 남은 조그만 상처가 훨씬 쓰렸던 게다.
  엄마는 팔다리에 로션을 바르고 천천히 옷을 챙겨 입었다. 허둥지둥 목욕탕을 벗어나려는 나와는 달리 느긋하게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요새는 등 굽지 말라고 철봉에 매달린다. 그게 최고라네.” 노인이 등줄기가 바르지 못하면 초라해져서 자식들한테 흉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늙은이가 윤기 없이 다니면 자식새끼들이 욕먹어서 못 쓴다고 새끼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엄마는 피붙이들을 당신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 두었다. 그래서 자신의 헐벗은 몸뚱이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훗날 한 페이지도 못 될 흉터 이야기 하나에 연연했던 내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외면하면 할수록 더 주체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덮쳐왔던 게다. 가리고 없는 듯 보여주지 못하겠다고 용을 쓰는 것은 자서전이 아닌데 말이다. 다음번에는 공짜 목욕을 시켜달라고 먼저 전화를 걸어볼까 싶다. 흉터를 드러내놓고 닦고 쓸어주다 보면 늘 거기에 있는 것으로 각인될 테니까. 나도 자서전을 쓰는 중이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죽 / 지영미  (0) 2023.01.03
줄지 않는 간장 독/진경자  (1) 2023.01.01
시렁 그네 / 이남희  (1) 2022.12.31
달팽이/손광성  (1) 2022.12.31
푸새하던 날/김현성  (1)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