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좌고우면/박순태

에세이향기 2023. 1. 7. 08:41

좌고우면

학생의 눈길에 미묘한 전류가 흐른다. 좌측에 시선을 보내다 살짝 머리를 숙이더니 우측으로 살며시 눈길을 돌린다. 이내 땀을 닦는 척 얼굴에 손을 올리더니 온탕에 들어오는 사람을 슬쩍슬쩍 훔쳐본다. 관찰자를 관찰한다는 심정이 되어 그의 시선 따라 생각이 몰린다.

신체 부위 하나가 감상대상이다. 해바라기 형은 기본이고, 곡선이 선명한 가락지형, 도깨비방망이형, 이빨 빠진 톱니바퀴형, 수탉 볏형 등으로 디자인되어 다듬어졌다. 조물주가 같은 사용도로 내린 선물일진데, 가지각색이다.

난이도 조정이 따라야 하는 실물 감상이다. 고정화된 예술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는 평면적 느낌 정리라면, 지금 눈앞의 실물은 즐기면서 이해하는 입체적 평가이다. 소지자는 물론 그 애용자의 심중에까지 다가가야 한다. 격 높은 상상력에 의미 확장이 무한대라서 냉탕 온탕을 오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파고든다.

퇴근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몰려든다. 녀석은 미온탕에서 눈을 감은 채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은 듯 느긋한 자세를 고쳐잡는다. 그의 눈이 바빠진다. 머릿속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삶의 진수가 숨어 있다는 우스개를 귀동냥했을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성 이론에 실물을 얹어 인간 심리의 저울추에 맞추려는 걸까. 훗날 자신의 삶에 전개될 무지개를 그려내고 있다 싶다. 청소년의 몸에서 해바라기 한 송이가 살며시 피어오를 듯하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세상의 기원’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내가 엄마 배속을 박차고 세상에 머리를 내민 문을 그린 작품이다. 세상 모든 것이 이곳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여성의 성기라면, 남성의 성기는 뭘까에 답을 찾으려는가 보다. 터부시하는 성문화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라 학생은 ‘세상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것이었다. 씨, ‘세상의 근원’을 생각하면서 보배로운 남성의 심벌마크를 하나씩 하나씩 비교 중인가 싶다.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면 가관이지 않으랴.

어릴 적 장면이 떠오른다. 여름날 학교를 파하고 냇가에서 멱감을 때다. 옷을 훌훌 벗어 바위에 던지고 내기라도 하듯 물속에 텀벙텀벙 뛰어들었다. 유독 한 명은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어깨를 움츠리고 중심 부위를 두 손으로 가린 채 사붓이 물속으로 들어왔다. 이 친구는 우리와 함께 멱 감는 게 고통이 되어 비지땀을 줄줄 흘렸다.

동네 형들은 멱감을 때마다 “너 여자랑 뭐 했지” 하며 그 친구를 놀려댔다. 그의 음경 귀두 부위는 포피로 덮여 있지 않은 채 벗겨진 상태였다. 저 멀리 아랍에서 태어났다면 성인의 통과의례인 할례를 거치지 않아도 될 특품을 달고 있었던 게다. 놀림당하기 싫어 외피를 당겨 내렸던 어린 마음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무지했던 성교육을 떠올리게 한다. 부모로부터 특별한 유산 하나를 받았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어 무릎을 쳤다. 그때의 주인공은 이제야 무직한 미소로 하늘을 안았다.

문득, 사용자는 누구이며 이용자는 누구냐에 귀결점을 두고 머리를 싸맨다. 사전적 풀이를 하자니 ‘사용’은 이익과 상관없이 단순히 쓴다는 말이고, ‘이용’은 이익을 전제로 하여 쓴다는 의미겠다. 대장부의 장비를 두고서 사용자와 이용자를 따져본다. 그 언젠가, 골계미 물씬 풍긴 인생 선배가 하늘에서 빙긋 웃는다. 껄껄한 목소리로 물건 하나 멋지게 만들었다며 으스대던 비뇨기과 의사였다. 말투에 묘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수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이 엄마가 허리를 살짝 치면서 미소를 머금더니, 같은 값이면 ‘해바라기’로 해달라는 요구였단다. ‘젊은 여인이 해바라기 맛은 언제 봤는지….’그분의 목에서 야릇한 물결이 일었다.

기억이 되살아난다. 동생들 기저귀 갈아줄 때 할머니는 음경을 슬쩍슬쩍 밀어 올렸다.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개구쟁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면 “네 엄마는 나중에 따뜻한 밥 얻어먹겠네.”라며 아낙들은 웃었다. 씨암탉에 한약재를 넣어 끓인 뒤 사위에게 대령하는 이는 경륜 쌓인 여인의 몫이었다. 몸보신에 명약을 찾는 이도 사모님들이다. 이용자의 암시가 실려 있는 게 아닐까.

꽃의 수술은 암술이 목줄을 빼 올릴 때 정성을 다한다. 수술은 한정된 시간에 꽃가루를 암술에 뿌리려 발싸심이다. 암술은 성이 차지 않아 바람에 손을 벌리고 벌과 나비에게 도움을 청한다. 암술과 수술이 한몸 되어 절정을 이룰 때 향기가 대기를 적신다. 꽃의 만개는 그들만의 황홀경이자 운우지정의 클라이맥스일까, 거기에는 암술 하나를 가운데 두고 무수한 수술들이 으르렁대는 피 토하는 결투장이다. 꽃향기는 수술들의 용트림 소리이리라.

여왕벌은 고공비행에서 무수한 경쟁자를 따돌린 수벌을 선택한다. 희롱만 당하다 일생을 마친 수벌들은 꽃봉오리 속에서 패잔병으로 스러진 수술들과 맥을 같이한다. 짐승들, 맹수 무리에서 짝을 차지하려는 수컷들의 싸움도 암컷의 조정일지다. 억지와 무리수를 두는 자체가 자연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애정행각의 절차이리라.

뭇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을 인간은 어찌 바라만 볼 수 있으랴. 자연이 펼치는 성애 다큐멘터리에서 아웃사이드로 빠질 수 없는 인간사. 태생적 으뜸만 선택받는 사회가 된다면 어찌 될까. 해답 찾기에 게을리할 수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성욕은 인생의 초기에 시작되며, 만족을 원하고, 표현이 매우 다양하기에 발달 과정상 잘못을 불러올 수 있다고 일러준다. 킨제이 보고서를 보면 남자들은 주눅 든다. 애정 관계 만족감에서 여성은 허기져 있다는 것이다.

남성은 태곳적부터 숙제 하나를 갖고 나온다. 타의 도움을 청할 처지도 아니다. 자아를 앞세운 입장에서 후천 개벽을 해야 할 형편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과 봉사가 따를지니 쉽사리 심벌마크 모양을 결정할 수 있으랴, 동반자의 바람이 큰 몫인 것을. 식물이나 금수처럼 본색을 드러낼 수 없기에 혼자서 끙끙거린 부산물이 오늘의 목욕탕 풍경으로 연출되었다 싶다. 성적 욕망은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원동력인가 보다.

꽃송이를 들여다본다. 동물들의 짝짓기를 관찰한다. 사랑은 사랑받았음을 표현해 올 때이고, 행복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임을 뭇 생명체는 연기한다. 그래서 그럴까, 인간은 그 묘수 찾기에 아직도 좌고우면(左顧右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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