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한 걸음 걸을 때마다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그때의 다급한 호흡은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골짜기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