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5/02/09 4

팔꿈치의 시간/최다정

팔꿈치의 시간팔꿈치가 이 책상을 떠나지 않도록 공들이며 여러 해를 보냈다.엄격한 선생님을 마주하듯이 온종일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肘不離此, 功以歲計. 如對嚴師, 終日敬畏.주불리차, 공이세계. 여대엄사, 종일경외.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 「책상에 새긴 글[案銘]」     시간은 만져지지 않는 채로 흘러가지만, 시간을 뚫고 살아낸 사람의 몸에는 흔적이 남는다. 예컨대 주름과 주근깨, 흉터와 굳은살 같은 것들. 몸 어딘가에 새겨진 짙은 얼룩은 그 사람이 어떤 사물과 얼마나 오랫동안 마찰하며 살아왔는지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살갗이 갈색빛으로 물든, 직선의 자국들이 이리저리 교차해 남아 있는 어떤 이의 팔꿈치를 바라본다.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를 대고 오랫동안 앉아 ..

좋은 수필 2025.02.09

시래기 / 도종환

시래기 / 도종환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도종환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중 「시래기」 전문

좋은 시 2025.02.09

문득 그 향기가 그리운 날엔/박관석

문득 그 향기가 그리운 날엔/박관석  정체 모를 냄새였다. 환부에 밀착했던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누군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코를 움켜쥔 채다. 잠시 후 바닷가의 비릿한 바람에 섞인 고약한 냄새가 응급실 구석구석을 점령했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작은 목소리가 어둑한 구석에서 흘러나온 것은.“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한 탓에 제대로 씻지를 못해서.”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향한 그곳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검고 긴 장화를 신고 음식물로 얼룩진 앞치마를 두른 그분은 엉거주춤한 채로 앉아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싶어 자세히 보니 냄새의 주인공은 근처 시장에서 장사하는 내 환자였다. 그녀를 알아본 순간, 신기하게 참..

좋은 수필 2025.02.09

참/홍억선

참/홍억선   ‘참’이라는 말은 사실이나 어긋남이 없고, 그 바탕이 진실하다는 뜻을 가진 참 괜찮은 말이다. 참기름, 참개구리, 참조기, 참깨처럼 어떤 낱말의 앞에 붙어서는 그 무리의 기준이 되거나 으뜸가는 품종을 증명한다는 품질보증서와 같은 기능의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이름 앞에 ‘참’ 자가 붙어 있으면 뭔가 진실하고 특별할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참나무도 분명 그런 속뜻이 있어서 ‘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원래 참나무는 한 품종의 나무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즉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등 도토리 육형제를 모두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 나무들이 이름에 ‘참’을 달고 나무 무리의..

좋은 수필 2025.02.09